[황용필 칼럼] 올여름 해외여행을 못 가는 당신을 위한 변명

  • 입력 2019.06.10 16:39
  • 수정 2019.06.10 16:41
  • 기자명 황용필 성균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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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는 지난해 1년간 세계에서 외국으로 여행한 관광객이 14억 명에 이르며 이는 2020년에 예상 목표를 2년이나 앞당겨 달성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2800만 명 이상이 해외여행을 한 것으로 나타났고 경기가 어렵다는 올해도‘7말 8초’성수기는 원하는 항공권이나 여행상품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유목생활을 접고 정착시대에 접어든 현대인들에게 왜 이렇게 반문명의 현상처럼 현대판 노마드(Nomad)들이 늘어나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인간은 본래적으로 모험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라는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의 견해에 따르면 애초에 하나님은 모험을 즐기시는 분이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면서 물질계의 무한한 장을 여셨고 천지창조의 대미는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면서 순진한 아담에게 모험의 DNA를 심어 두신 것이다. 라틴어 AD VENTURA에서 파생된 모험이란 영어 'Adventure'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여행은 일종의 모험이다.
영어 단어 'travel'은 고통을 뜻하는 트라베일(travail)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이었고 그러다 보니 고통스럽고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은 이와 대비되는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는데 관광(tour)이었다. 살만해지고 여가의 수단으로 여행은 즐기는 것이 되었고 이제 너 나 할 것 없이 여행자(traveler)보다는 관광객(tourist)이 되었다.
그래서 현대판 노마드들에게 여행은 행복의 수단이다.

2017년 문화관광연구원 자료에는 1단위 여행 횟수가 늘어나면 삶의 만족도는 0.03단위 증가하며, 1단위의 여행 만족도가 증가하면 삶의 만족도를 0.46단위 높여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연구팀들은 일상의 다양한 경험들이 얼마나 행복감에 영행을 주는지를 측정하는 소위 경험표집법을 통해 조사한 결과 가장 의미가 높고 재미있는 활동으로 여행을 꼽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음주, 데이트 활동보다 재미나고 자원봉사나 종교 활동보다 의미 있는 활동으로 꼽은 것이다. 여행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에 대한 해방감에 낯선 곳을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끼리 걷고, 먹고 구경하고 수다를 떨기 때문에 한마디로 행복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런데 깃발부대나 SNS 인증 샷 여행은 그 자체가 바로 고통(travel)이다.
두 가지를 유념하면 된다.
행복이 정서적 강도보다 빈도에 달려있듯(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여행도 값비싼 일회성보다는 저렴한 비용으로 자주 가는 것이 좋다. 인생에 의미 있는 것들이란 돈으로 사는 물건보다는 경험이다. 찰나의 키스 경험이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짜릿한 선물이 되는 것처럼.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해외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는 억지 같지 들린다. 실제로 미국인들 가운데 여권을 갖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외국에 가지 않아도 합중국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땅도 의외로 넓고, 역사는 미국보다 길다. 

 

      
여행이든 걷기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음미(Savoring) 하는 기술이다.
음미란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생활의 레시피다. 시를 읊조리며 그 의미를 감상하거나 와인의 맛을 오래 풍미하는 느끼는 생활의 넛지(Nudge)다.  
음미의 기술은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강릉 어느 사찰에 가면 사발 커피가 유명하다. 원두를 볶고 갈고 내린 커피는 다완(茶豌), 차 마시는 큰 사발에 담는다. 커피를 사발에 담아 마시는 이유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들어 드시라는 뜻이다. 커피의 본산 에티오피아에서는 손잡이가 없는 작은 찻잔 '시니(Cini)'에 넘치도록 부어 마신다.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지기까지 있었을 과정들과 수고를 온전히 향에다 실어 각별하게 느끼라는 것이다. 남도의 어느 유명한 명승도 소소한 규칙을 걸었다. 
여느 관광지처럼 훌쩍 점 찍고 가지 말라며 최소 30분 이상 머물고, 오자마자 촬영부터 하지 않으며, 스마트폰 검색 대신 눈과 귀를 열어 사색하라는 거다.

"나는 집에서 우울할 때면 기차나 공항버스를 타고 히드로공항으로 가서 2번 터미널에 있는 전망대나 북쪽 활주로 변에 있는 르네상스 호텔의 꼭대기 층에서 끊임없이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알랭드 보통의 쪼잔한 <여행의 기술>이다.  

잠심완미(潛心玩味),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시고,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며, 한 줄의 글을 읽고, 계절이 바뀌는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다면 강진 해안가든 알프스 산골이든 당신은 이미 여행의 베테랑이자 고수다!

 

Profile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치학박사 
「걷기 속 인문학」저자

前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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