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필 칼럼] Hic et Nunc, 존재적 실존 양식은 이 순간이다

  • 입력 2019.05.28 15:38
  • 수정 2019.05.28 15:39
  • 기자명 황용필 성균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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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곱게 피던 어느 이른 봄날, 사랑하는 후배들의 초청으로 군사교육의 요람인 자운대(紫雲臺)에 특강하러 갔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 꽃들의 잔치였다. 신작로 양쪽을 흐트러지게 장식하고 서 있는 연꽃의 물결, 갈잎 큰 키 나무의 꽃은 글자대로 꽃 모양이 연을 닮았다 해서 불리는‘나무의 연(蓮)’목련(木蓮)이다.
그래서 목련의 꽃말은 자비, 은혜, 고귀함을 담았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 '연모'라는 애틋한 꽃말을 갖고 있어 아름다움으로 시선은 끌지만 뜻깊은 날 연인에게 선물하기에는 너무 아픈 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목련은 그리운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자리에서 또 진다.
그런데 그날 목련의 빛깔은 좀 달랐다.
어린아이 살결처럼 뽀얀 빛깔이 아닌 누렇게 변한, 아니 어느 꽃잎은 타들어가는 속내처럼 검은 빛까지 드러냈다. 어쩐 일인가 궁금해 물었더니 바로 이틀 전 몰아친 꽃샘추위 때문에 만개한 꽃들이 얼어서 그렇단다. 

 

아이러니다. 날씨란 양반은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우게도 하지만 저렇게 또 얼리게도 한단 말인가? 약주고 병 주는 꼴이다.

30도를 육박하는 초여름 어느 날, 두 달이 넘어 다시 자운대를 찾았다. 
꽃들이 사라진 신작로에는 짙고 싱그러운 신록이 울창하다. 
햇빛을 반사하는 잎들 때문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것도 있다. 
꽃도 아름다우나 신록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어느 나무도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인들 오래 품지 않는다. 백일 가는 배롱나무의 백일홍도, 끈기의 무궁화도, 검붉은 장미꽃도 한철이다.
 
계륵 같은 것 중에 하나가 옛 직장의 명함이다.
특히 퇴사한 후 당장 새로운 일을 하지 않는 처지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옛 명함을 건너게 된다. 직위가 있는 임원이나 부서장 시절의 명함이라면 더욱더 버리지 못한다. 어떤 이는 대선 치른 지가 한참 지났건만 아직도 무슨 무슨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들고 다닌다. 옛날의 영화를 추억하는 것도, 한때 나를 증명하는 팻말도 아닌지라 그저 남은 명함을 주면서 "옛 직장 명함입니다." 하면서 양해를 구하나 개운치가 않다.
어떻든 그 아랫목에는 과거를 버리지 못한 '미련'때문이다. 
노인의 비극은 늙은 것이 아니라 한때 잘 나간 이야기를 축음기처럼 아무 때나 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호플론이라 불리는 둥근 방패로 무장한 아테네의 전사 호플리테스(hoplites)를 기반으로 코린트 전쟁(B.C.395∼B.C.387)을 비롯한 여러 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과거 독재자 히파이아스를 물리친 공로로 존경을 받는 하모디우스가문의 한 사람이 이피크라테스 장군을 향해 "천한 구두장이 집안의 아들 주제에 어딜 감히 함부로 나서냐!”며 모욕을 퍼부었다. 이피크라테스는 자신의 가문을 들춰가며 비난하는 정적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내 가문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당신의 가문은 당신에게서 끝난다."

'흙수저', '금수저'식으로 출생이나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고 골인지점까지 달라야 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저 청청한 신록도 한때 눈부신 꽃들의 흔적이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랑한 꽃, "오 장미. 순수한 모순의 꽃", 저 오뉴월의 찬란함도 다 버리고 지나간다.

지갑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옛 직장의 명함은 얼어버려 누렇게 색이 바랜 목련꽃이다. 왜 지금은 없어진, 남이 된 시절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즉시현금 경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현재일 뿐 다른 시절은 없다. 
지금, 여기(hic et nunc)! 존재적 실존 양식은 이 순간이다.

"지금 증명된 것들은 한때 단지 상상했던 것이다.(What is now proved was once only imagined)!" 윌리엄 블래이크의 말은 발전시키자면 이렇다.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은 언제가 현실이 된다.
요컨대, 과거에 먹을 주지 말라!

 

Profile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치학박사 
「걷기 속 인문학」저자

前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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