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필 칼럼] 이클립스(eclipse)

  • 입력 2019.05.20 19:59
  • 수정 2019.05.20 20:00
  • 기자명 황용필 성균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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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며, 비는 내리며 강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별은 빛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꽃은 피고 진다.
그러기 위해 새에게는 날수 있는 날개가 있고, 물고기에게는 헤엄치는 지느러미가 있으며, 꽃은 아름다운 향기를 품는다. 그런데 점점 새는 날지 않고, 물고기는 헤엄치지 않고, 꽃은 굳이 향기를 내지 않는다.

몸무게 250그램의 큰되부리도요새는 알래스카와 뉴질랜드 사이를 한 번도 쉬지 않고 11,500km의 거리를 꼬박 일주일 동안 시속 70km로 이동하고 극제비갈매기 역시 북극과 남극 간 12,000km를 날고 한해 9만 km를 이동한다.
아메리카의 열대산림이나 덤불에 서식하는 벌새는 가장 작은 몸짓으로 1초 동안 무려 55회나 날개를 퍼덕인다. 
물고기 중에 농어목 황새치과의 돛새치(pacific sailfish)는 시속 130km로 물속을 헤엄치는데 등지느러미가 돛 모양과 같게 위로 쭉 뻗어 올라와 있어 가히 바다 속의 KTX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날지 않아도 되는 새들이 있다. 천척이 사라지고 먹이가 풍부하기에 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새들이다. 뉴질랜드 국조 '키위새'는 물론 타조나 닭둘기로 불리는 비둘기도 땅 위를 걸으며 모이 쪼는 시간이 더 많다. 
코이(Koi) 라는 비단 잉어는 어항에서는 불과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연못에 넣어두면 15~20cm, 강물에는 90~120cm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코이는 비전설계자들에게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그리스어로 '말'을 뜻하는 해마라는 물고기는 '바다의 말'(sea horse)로 불리듯 헤엄치는 대신 수직으로 서 있기도 하고, 두 개의 작은 가슴지느러미와 한 개의 등지느러미를 이용하여 천천히 이동하기도 한다. 
꽃들은 또 어떠한가? 난향만리(蘭香萬里)에 천상의 향기를 자랑하는 꽃들도 많지만 신라 선덕여왕의 고사에 등장하는 것처럼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향기 없는 모란꽃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날지 않는 새와 헤엄치지 않는 물고기, 향기 없는 꽃이 카오스가 아니다. 키위 새가 한 나라의 국조로 평가되고, 향기 나지 않은 모란꽃으로  영랑시인은 그 쓸쓸한 날에 하냥 섭섭함을 달랬으며, 수컷의 배에서 자라는 해마는 부성애의 상징으로 꼽힌다. 
가정의 달 어버이날이면 홑껍데기 같은 늙은 부모님도 그렇다.
살아계신다는 존재감 하나로도 객지에 흩어진 가족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을 보라.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부모의 묘는 생각보다 더 깊이 파라. 자식걱정 때문에 다시 나오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어미오리가 털갈이할 때는 날지 않는다. 때로 날아오르는 능력조차 잃어버린다고 한다. 이런 털갈이를 가리켜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을 빗대어 이클립스(eclipse)라고 하는데 새로운 깃털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시간이다. 끊임없는 경쟁과 속도가 대세인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클립스와 같은 공백의 시간, 여백의 미가 아닌가 한다.
 
코너 오피스(corner office)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빌딩의 네 귀퉁이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창문이 두 방향으로 트여 있어 전망이 좋다. 이런 사무실은 주로 최고경영자의 집무실로 머릿속의 소음을 비우고 마음속의 사색을 채우는 최고의 이클립스 공간이다.

 

복구자비필고(伏久者飛必高), 오래 엎드려 힘을 비축한 새는 반드시 높이 난다. 엎드림이란 그저 피상적 혹은 모양으로만 웅크림이 아닌, 진정으로 모든 잡념과 소음을 없애고 자기 자신을 수련하며 고뇌하는 시간이다.
번듯한 건물이나 장소일 필요도 없다. 나만의 작은 휴식 공간, 사색의 공간이라면 번잡한 커피숍에서도 카렌시아(Querencia), 결핍을 보충할 수 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다.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Profile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치학박사 
「걷기 속 인문학」저자

前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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