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몽상하라', 알지 못함의 불안함에 머물러라

  • 입력 2019.05.15 21:31
  • 수정 2019.05.15 21:32
  • 기자명 조신애 K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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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시작, 그 어설픔 채로 초라함을 버티는 것'으로 첫 글을 열었다. 그럴듯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우리 자신에게 나답게 살기를 도전했고, 그 길이 '바보의 여행인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험하라 요청했다. 칼럼에 남겨진 피드백 중에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못 하고 그냥 힘들다 하고만 있었는데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다."라는 댓글이 왠지 짠하게 와닿았다.  

사실 세상은 요란스럽고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은 내가 나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감과 허무함, 무기력감, 속수무책의 감정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인생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원치 않은 만남, 또는 이별, 어쩌면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누군가는 끊임없이 살길이 막막했고,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 일이 안 풀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때론 가슴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고도, 그냥 그 채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들 잘 사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나만 사는 게 힘들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삶은 속 시원하게 풀어낼만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겐 질문을 하라고 부추긴다.

그런데 말이다. 그 절망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그 절망을 끌어안을 때가 있다. '될 때로 되시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자존심은 박살 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에 예상치 못한 평온함이 노크를 한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다 빼앗겼다고 생각한 좌절의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나는 그 감정을 '항복'이라 말하고 싶다. 

'항복'
'아. 나는 항복합니다.' 나를 꽁꽁 에워싸던 인생의 전투복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순간이다. 기를 쓰고 지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나라고' 착각해왔던 수많은 가면들일지 모르겠다. 그놈의 몹쓸 욕심쟁이 자아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나란 존재가 산산조각 부서진다. 극한의 고통 한가운데서 놀랍게도 잠깐 '무한'이 되는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파괴는 오히려 초월의 빛이 되는 역설을 만든다. 그 찰라 온전한 나와 만나지고, 이해하지 못할 만큼 미웠던 타인과도, 불신으로 가득했던 신과도 화평의 장이 마련된다. 유한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신의 은총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잠깐 억울함과 분노에 휩싸인 나를 수용한다. 마치 과거 우리가 어렴풋한 달에 소망을 품어왔듯 불안함에 기대는 의식이 시작된다. 이것을 '몽상'이라 말하고 싶다. 몽상은 꿈꾸는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자 옥덴은 이런 '몽상'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꾸지 못한 꿈, 방해받은 꿈을 다시 꿈꾸게 됨으로(몽상함으로) 우리는 존재가 되어간다"

 

'마음을 열어두기'
학자들의 시선을 빌려 다시 얘기하자면, 명료하지 않은 것, 알지 못함의 불안함에 머물 수 있는 힘이 몽상이다. 몽상하는 시간은 나 자신이 존재하는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과의 만남 한가운데로 불편한 것들이 흘러오도록 열어두는 태도이다. 조급했던 내 속도를 잠시 지연시키는 것에 동의하는 일이다. 그렇게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는 의식을 확장시킨다. 몽상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정의하기 위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모호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역설적 태도가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알지 못함'에 머무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몽상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으로 정기적으로 소개하는 칼럼에서 몽상하는 구체적인 방법들도 차츰 소개할 예정이다.) 상담사이자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그간의 임상적 데이터를 살펴보다 공통적인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상담코칭 고객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사례 공개를 허락한 몇 가지 예를 소개해 보자면,

(사례1. K군. 1회기) "저를 판단하시기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지, 도움을 주시려는 바가 뭔지 명확히 제시해 주세요. 알지 못한다면 의욕이 떨어질 것 같아요." 
(사례2. L양. 1회기) "전 그냥 들어주기만 하는 것 보다는 이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인 입장을 듣고 싶어요. 한마디로 해결이요"
(사례3. M양. 1회기) "저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해요. 그리고 조언을 받고 답을 좀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분명한 답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인생에 때로는 잠시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의 모호함에, 타인의 모호함에, 상황의 모호함에 말이다. 무언가 분명히 하려는 조급함은 우리를 경솔하게 한다. 우연히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을 읽다가 모호함에 머물며 몽상하는 일이 이런 게 아닌가 싶던 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어느 날 아침 난 한 나무의 껍질에서 번데기를 발견했다. 나비 한 마리가 이제 막 나오려고 준비하면서 번데기 집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자 나는 기다리다 못해 몸을 구부려 입김을 후 불어 도와주기 시작했다. 내 노력에 힘입어 눈앞에서 빠르게 번데기가 열렸고 번데기 속에서 나비가 기어 나왔다. 그런데 나비의 날개가 다 펴지지 못한 채로 구겨져 있었다. 나의 성급한 도움이, 나비가 스스로 충분히 제 날개를 펼치는 순간을 뺏고 불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는 몇 초 후 버둥거리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버렸다. 나비는 참을 성 있게 번데기에서 탈태하여, 햇볕 아래서 천천히 날개를 펴고 일어나야 했다. 나의 조바심이,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범하는 일이 되었다. 신뢰를 가지고, 영원한 리듬에 순응해야 한다." 
-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니코스 카잔차스키 –

"느슨하게 매달리기"
왜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영원한 리듬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급하게 하는 것일까? 단테가 천국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에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과정에 순응하며 느슨하게 매달려 보자. 때로. 가끔. 그래보자.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서 먼동이 트는 그 새벽빛에 감탄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 몽상하세요. 그리고 느슨히 매달려 보세요. 예상치 못한 문이 열릴 거예요."

Profile 
연세대 상담코칭학 석사
(사)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에니어그램 전문강사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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