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삶이자 전부"

상처 보듬고 위로 건네는 김영미 작가

  • 입력 2019.04.19 09:21
  • 수정 2019.04.19 15:54
  • 기자명 김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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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추위가 떠나고 따스한 봄이 찾아오는 시기처럼, 18년 동안 칩거했던 가운데 꽃이 기지개를 피듯이 작품 활동을 하는 주인공. 3년 전부터 다시 붓을 잡아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김영미 작가와 작품을 4월의 어느 월요일에 그의 화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는 옛말처럼 18년의 시간은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게 가로막은 장애물이자 어두운 터널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한층 더 깊어질 수 있게 한 밑바탕이었다. 캔버스에 수많은 선을 긋기 위해 상처를 내는 동시에 마음을 보듬고, 따스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18년의 공백 끝에 다시 시작한 활동
작품을 그리는데 매진하던 김영미 작가가 “화실이 조금 정리가 덜됐네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화실을 찾은 피플 투데이를 반겨줬다. 18년의 공백을 털어내고 다시 붓을 잡은 지도 어느덧 3년. 그동안의 쌓였던 그리움과 아쉬움 때문일까? 김 작가의 일상은 그림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통 하루에 반나절, 많게는 20시간 가까이 그림을 그리는데 시간을 보낸다는 김 작가. 18년 동안의 아쉬움을 지워내는 동시에 아직도 표현하고 싶다는 게 많다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동안 그림을 못 그렸던 시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에게는 지금의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다고 말한다.
“작품을 준비할 때는 현실은 잠시 잊고, 온전히 그림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었어요. 한편으로는 모름지기 작가는 자신만의 색깔, 상징을 드러내는 기법과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온과 안식을 담아낸 <사랑나무> 시리즈로 활동의 시동을 건 그는 2017년 첫 개인전의 작품을 재해석한 노스탤지아 시리즈를 선보였다. 어릴적 추억과 경험 등을 바탕으로 한 당시 작품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퇴적된 형상기법인 빗살 무늬가 사용됐다. 현재는 ‘심상(心象)이라는 새로운 시리즈와 함께 판화적 기법으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던 작가
“남들은 산이나 들에 다니면서 개구리나 메뚜기 등 잡으면서 뛰놀았잖아요. 저는 그냥 혼자서 이젤과 캔버스를 메고 돌아다녔어요. 옛날에는 미술학원이 드물었잖아요.”
범상치 않은 작품들을 둘러보며 어렸을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녔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하는 김영미 작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김 작가는 한창 그림에 빠져있었다. 워낙 미술책이 귀해서 달력에 나온 화가들의 명작을 따라 그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며 당시의 추억을 그렸다.

그의 첫째 언니가 이젤과 캔버스를 사다주면서 그림의 매력에 한층 빠진 김 작가. 특히 중학교 시절에는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다. 이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및 대학원으로 진학한 김 작가는 다양한 기법과 장르를 배웠는데, 그중 들었던 판화수업은 그의 작가 생활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1990년 대회에서 첫 입선을 하는 등 그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보여줬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사회초년생이었다. 하지만, 김영미 작가는 자신의 첫 전시라는 목표를 위해 3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꾸준히 돈을 모았다. 그렇게 돈을 모은 김 작가는 28살에 당시 인사동의 가장 큰 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됐는데,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퇴적된 형상>이라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형상을 차용한 그림을 선보였는데 좋게 봐주신 분들이 계셨어요. 저는 팔릴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해서 작품 가격도 안정해놨었거든요.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도 판매가 됐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믿기가 어려워요.”
당시 대관료 밖에 없었던 그에게 행운이 따랐고, 밀렸던 재료비랑 도록비를 한번에 갚을 수 있었다. 뉴욕에서 초대전도 들어오는 등 공백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다. 

상처를 치유하고 힐링하는 그림
조각칼로 스크래치하고 세로로 긁어내고 그위에 덫칠하는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 김영미 작가. 쉽게 말하면 캔버스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제 옛 기억도 떠오르죠. 누구나 그렇잖아요. 살면서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받고, 갖고 사는 것처럼요.”
집중해서 조각칼을 잡고 혼신을 다해 칼집을 내는데, 단순하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으로 인해 손의 마디마다 굳은살이 베기고, 팔목 안쪽에 상처도 났으며 디스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과정은 오히려 김 작가의 마음에 한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캔버스에 남긴 ‘상처’는 자신이 살면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감정이 이입되기도 한다.
수많은 상처를 남긴 캔버스에 김 작가는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리움 그리고 고마움을 담아 아크릴에 돌가루를 섞은 물감으로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그러면서도 나무, 새, 구름, 하늘 등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친숙한 소재를 사용하기에 그는 투박한 느낌을 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함이 묻어나는 존재가 풍기는 독특한 미(美)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제 작품은 ‘치유와 힐링’의 그림이에요. 보는 이로 하여금 평안을 느끼게 하고자 현란한 원색은 자제하고, 두 가지 이상의 색을 혼합해서 사용해요. 이렇게 색을 혼합해서 만들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 시키지 않거든요.”

삶과 생활을 의미하는 캔버스
자신을 표현하는 캔버스는 김영미 작가에게는 삶이자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 작품에 몰두하면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김영미 작가는 작지만, 큰 꿈을 꾸고 있다. 이웃 나라인 중국처럼 우리도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훌륭한 작가가 많이 등장하길 바라는 동시에 예술국가로 거듭나면서 국제 미술계에서 더욱 영향력을 끼치길 희망했다. 이런 꿈을 위해 김 작가는 작품 활동의 더욱 더 매진할 생각이다. 

“아들에게도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에요. 수능을 앞둔 고3인데, 작품에 몰입하다보면 많이 신경을 쓰지 못하거든요. 저도 좋은 작품을 만들고, 아들도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어요.”
이런 부분이 이뤄지기 위해서 김 작가는 정부의 지원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미술의 인식도 변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물론 아닌 분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보는 미술에 대한 인식이 아쉬울 때가 많아요. 흔히 명품가방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작가들의 그림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쳐주지가 않거든요. 우리 미술도 충분히 매력이 있고, 가치가 있는데 말이죠.”

스스로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업실이라고 낮춰 부르지만, 그 꿈을 꾸기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캔버스가 삶과 생활 전부였던 김영미 작가와의 유쾌하고 즐거운 만남이었다.

Profile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全 군산대학교, 목원대학교, 대진대학교, 우석대학교 출강

수상
1990년 한국화대전 입선
1992년 춘추회미술대전 입선
1992년 미술세계대상전 대상
1993년 MBC미술대전 입선
1995년 4회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996년 15회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997년 16회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개인전
1995년 공평아트센타(서울)
1995년 swan gallery(뉴욕)
1998년 단성갤러리(서울)
2015년 소셜갤러리(서울)
2015년 갤러리 환(서울)
2016년 아트리에(안양)
2016년 인사동담갤러리(서울)
2017년 유나이티드갤러리(서울)2017 ㅡ아라마리나 D 23 요트(인천)    
2017년 재복갤러리 초대전(광주광역시)
2018년 까루나갤러리(서울)
2018년 5월 갤러리봄뜻개관초대전(서울)
2018년 6월 갤러리봄뜻기획초대전(서울)
2018년 이노갤러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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