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지옥으로 떨어지는 예술가

라스 폰 트리에, <살인마 잭의 집>

  • 입력 2019.03.19 16:19
  • 수정 2019.03.19 16:38
  • 기자명 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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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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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영화에 빠져 있는데, 어차피 한 줌도 안 되는 관객들 중에서 다섯 명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통에 집중이 흩어졌다. 그들은 대체 어떤 영화를 기대하고 여기까지 온 걸까.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살인마 잭의 집>이라는 제목만 보고 <잭 더 리퍼> 같은 뮤지컬이라도 연상했던 건 아닐까.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가 다루는 주제는 그 본질을 낱낱이 드러내게 된다. 그가 살인을 다루게 되면, 타이어 잭으로 순식간에 머리를 가격해 죽이는 살인마 잭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살인마가 살인에 앞서 노래를 한 곡조 뽑는다거나 멋들어진 포즈를 취한다거나, 그런 종류의 미학을 그의 영화에서는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봐 왔던 사람이라면 이번 영화가 오히려 얌전한 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다른 영화들보다는 주제의식도 명확한 편이다. 연출은 강렬한 메시지를 주입하는 수단으로 완벽하게 기능한다. 도저히 열리지 않던 창고의 문이 대량학살을 앞두고 거짓말처럼 열리며 아름다운 플롯을 완성하는 순간의 전율을 느낄 수도 있다. 이번 영화에서 부족한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뿐이다. 그런 것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나?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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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네, 잭
관람객들은 예상대로 이 영화가 ‘지나치게 잔인하다’, ‘상식 이하다’라며 판에 박힌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예술가를 길들이려 한다. 잭에게 예술관에 대해 설교하는 버지 역시도 그렇다. ‘예술가는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 대해 노래해야 한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 사람들은 쉽게 미와 예술을 동일시한다. 예쁜 것을 보고 예술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에게 인간의 추한 면을 보여주는 예술이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솔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가상의 저작물에 너무 쉽게 몰입한다. 습관적으로 예술의 요소를 현실의 가치관에 끼워 맞춘다.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는 일상에서도 욕을 먹고 소금을 맞는다. 완벽한 몰상식을 경험했으면서도 그 배우는 ‘내가 연기를 잘 해서 그렇지’하고 성취감을 느낀다고 한다. 글쎄, 착각은 본인의 자유다. 그러나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학계에서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분류하며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하도록 권장한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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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면, 결과는 뻔하다.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은 기본이다.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이민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살인마 잭이 회고하는 다섯 명의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기 때문에, 전국의 여성단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감독에게 영화 속 피해자들이 모두 여자인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일 것이다. 아동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장면에서는 학부모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치 감독이 직접 그런 범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사 사무실 앞에서 계란이라도 던져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사회의 도덕이 바로섰다고 자평할 게 뻔하다.

지난 2017년 자살한 소설가 마광수는 음란 서적 제조 혐의로 필화를 겪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사회의 괄시와 비난을 견뎌야 했다. 그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뿐이다. 그는 죽기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름대로 작품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졌는데, 막상 평론가들은 비난만 했지 정식으로 평가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일생 성이라는 주제를 파헤쳐보려고 애를 썼는데 남는 게 없네요.”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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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은 범죄보다 역겹다. 예술은 예술이다. 인간은 분명히 추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명확하다. 그 욕망이 범죄로 번지지 않도록 억제하는 역할은 예술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있다. 오히려 예술은 인간의 추를 가상의 세계로 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기능은 예술이 가진 최고의 기능이다. 추미醜美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솔직한 해방구다. 두 시간이 넘도록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면 하품이 나와야 정상이다. 전형을 따르는 것은 창작이 아니다. 답습은 단순노동에나 어울리는 방식이다.

잭이 지은 집
잭은 나무로도 벽돌로도 집을 지을 수 없었다. 남들과 같은 재료로 집을 지으려 하면 번번이 무너졌다. 그런 집에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결국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재료로 삼아, 시체로 쌓은 집을 지어야 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만든 집에서 그가 쉴 수 있을 리 없었다. 추악한 미래를 알면서도 그런 집을 지어야 했다. 낫을 휘두르며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호흡 소리를 동경했으나, 정작 그의 머리를 채우고 육체를 추동한 소리는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암시하는 소리, 지옥의 쳇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이것은 감독이 자신의 예술관을 잭의 이름으로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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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잭이 자동차에 기대어 넘기는 카드에 적힌 단어들은 결국 감독이 스스로 규정한 자의식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평범한 로맨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처음부터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결국은 폭력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감독이다. 자신의 예술관에서 형형히 살아 숨 쉬는 우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욕망으로 피와 살을 터뜨려야만 한다. 인물들을 불행과 죽음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것은 한 명의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표현의 욕구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로 행복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는 끔찍한 영화를 만들면서 쾌감을 느낀다. 따뜻한 햇살 아래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 모르나, 어차피 예술가로서의 라스 폰 트리에는 끊임없이 머릿속을 괴롭히는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화광이다. 앞에서 오리 다리를 꺾는 장면을 던져 놓고 나중에 아이의 다리를 꺾는 장면으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형식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까.

잭은 마지막까지도 반성하지 못했다. 아니, 반성하지 ‘않았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을 쳤다. 인도자가 다리가 끊어진 계단을 가리키며 말한다. “예전에는 이 다리가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끊어졌다. 원하면 저 벽을 타고 건너가도 좋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잭은 도전했다. 마지막까지 살고자 했다. 추악한 악인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절벽을 기어가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뛴다. 최후를 앞둔 잭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지금 라스 폰 트리에가 걷고 있는 길이 아닐까. 모든 윤리와 관습을 초월해 오직 영화와 예술을 만들고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천국으로 가고 싶은 미련을 포기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 길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길이라면, 그 아래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한 불구덩이라면, 겨우 한 걸음씩 버텨내다가 힘이 다한다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길 속으로 추락하는 잭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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