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시 승격’ 118년만에 자존심 회복

  • 입력 2013.09.03 14:21
  • 기자명 이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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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승격’ 118년만에 자존심 회복

김춘석
|여주 군수

소년의 아버지는 역무원이셨다. 아버지는 수원-여주 간을 잇던 협궤 철도 노선 위에서 기능직 공무원으로 평생을 일하셨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6남매의 맏아들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서울대에 입학시켰다. 젊은 역장이 아버지를 “김주사, 김주사” 부르면서 일시키는 장면을 수없이 보면서 소년은 그냥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철도와 더불어 일생을 바쳐온 아버지의 성실함을 닮은 소년은 1973년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소년은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같이 강직하게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여주군의 수장, 김춘석 군수의 이야기다. 30년 중앙부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지난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 고향 여주로 돌아온 김춘석 군수를 지난 7월 11일 만나 지난 3년간의 고향살이 이야기를 들어봤다.

취임 이후 3년동안 흘린 땀방울 ‘도·농복합 시’로 화려한 결실
김춘석 군수는 등산 마니아로 유명하다. 25년 넘게 산을 탔지만 최근 몇 년은 마음 편하게 산에 오를 시간이 없었다. 올 초 자전거를 사놓고도 한 3번 탔나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 보름에 한 번 하는 염색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생활적인 측면에서 김 군수의 고향 여주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고된 행군의 연속이었다.
특히 취임 3년을 맞아 여주군은 큰 변화의 기점에 놓여 있어 김 군수도 눈 코 뜰 새 없다.
여주가 2013년 9월 23일자로 ‘도·농복합형태의 시’로 새 옷을 갈아입고 남한강에서 힘차게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 여주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 5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고 6월 4일 법률이 공포됨으로써 최종 확정됐다.
정부입법으로 추진한 ‘경기도 여주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됨으로써 여주는 오는 9월 23일자로 ‘여주시’로 승격하게 된다. 이로써 여주는 1895년(고종 32) 여주목에서 ‘군’으로 강등된 이래 118년 만에 ‘시’ 승격 이라는 경사를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김 군수는 그 어느 해보다 바쁘고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여주가 크게 부흥했던 시기는 지난 1469년(조선 예종 1년) ‘여흥’을 ‘여주’로 고치고 ‘여주목’으로 승격하여 목사가 다스렸던 때입니다. 이제 118년 만에 ‘도·농복합 여주시’로 승격됨으로써 다시 한번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평가됩니다. 여주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이번 성과에 따라 향후 시 설치에 따른 후속조치를 철저히 추진함으로써, 주민들에게 품격 있고 더욱 향상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게 됐습니다.”
김 군수는 집무실에 ‘류한흥국(流汗興國-땀을 흘려 나라를 일으킨다)’ 사자성어를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되새기며 일한다. 30년 넘게 중앙부처에서 일한 공무원 출신이지만 이제는 ‘류한여주(流汗驪州-땀을 흘려 여주를 일으킨다)’ 신념으로 일하고 있다.

중앙부처 30년 생활보다 여주군수 3년이 더 행복하다
김 군수가 2010년 취임했을 때 당시 700여 명의 여주군 공무원들은 소극적이고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중앙 부처에서 오래 일했던 그의 경험상 같은 공무원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취임 초창기에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버럭군수’다.
“여주군은 1960년부터 현재까지 인구가 11만을 넘지 못하는 각종 규제로 발묶인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직자들도 어떠한 민원에 대해 ‘안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취임 후 가장 먼저 공직자 마인드부터 바꾸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군민을 위한 적극행정상’을 만들어 공직자 11명을 승진시켰습니다. 3년이 지난 현재 여주 공무원들은 안 되는 여건 속에서도 군민을 위한 작은 틈새를 고민하는 적극적인 공직자로 변했습니다. 시 승격 보다 우리 공직자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변화가 가장 큰 보람입니다.(하하) 그리고 중앙 부처 30년 생활보다 여주군수 3년이 더 행복합니다.”
김 군수는 딱 세 가지 경우에만 화를 낸다. 거짓말 하고, 불친절한 것 그리고 서류를 깔고 앉아 안 된다고만 하는 경우다. 이제 더 이상 김 군수는 화 낼 일이 없다. 그만큼 공직자들은 변화했다.

여주군수 김춘석은 집념의 사나이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때 자취를 하면서 연탄불 위에 밥을 해먹고 국을 끓여 먹었던 힘든 시절에도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텼다. 목적은 명료했다. 공무원이 되어서 후손들을 위한 행정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김춘석은 그 꿈을 이뤘고 지금 현재 고향 여주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집념은 여주를 변화시켰고, 여주를 살려냈고, 시 승격에 발맞춰 남한강에서의 힘찬 비상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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