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기의 미술여행] 인도 아우랑가바드(Auranagabad), "500년 종교문화의 꽃 엘로라 석굴"

  • 입력 2018.10.04 15:03
  • 수정 2018.10.04 15:05
  • 기자명 김석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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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가바드로 가기 위하여 뭄바이의 기차역 광장에 도착한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릭샤와 차량들이 뒤엉켜 무절제한 경적소리를 낸다. 귀가 멍멍하다. 들끓는 사람들 사이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회색도시의 음울한 색채가 공포와 두려움까지 느끼게 한다. 상상하기 힘든 혼란스러움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탈것들이 한 치의 충돌이나 불편한 표정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기차에는 상위 계급과 부자들이 타는 A1, A2, A3로 분류되는 침대 차량이 있는가 하면 남루한 옷차림의 승무원들이 물과 차를 나누어 주는  좌석제 특급열차도 있다. 콩나물시루 같은 일반열차가 있기도 하고, 불도 밝히지 않고 한 밤을 달리는 깜깜한 암흑의 열차도 있다. 
아우랑가바드로 가기 위하여 침대칸에 올랐다. 한 칸이 4인용으로 만들어진 2층 침대차다. 구질구질하다고 표현을 해야 할까,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을 해야 할까, 침대에 드리워진 거무칙칙한 커튼의 색채와 냄새가 아내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체념한 듯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아내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차창도 가려진 침대열차에 꼼짝없이 감금된 상태다. 가끔 아내가 누워있는 쪽을 건네다 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여유로워지기까지 한 그의 표정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엘로라 석굴에서 김석기 작가
엘로라 석굴에서 김석기 작가

뭄바이를 떠난 기차는 8시간을 달려 밤 12시, 아우랑가바드 역에 도착한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엘로라 석굴’로 향한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엘로라 석굴까지 28km를 달리는 차창에 무한대의 지평선이 전개되고, 그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절경이 인도의 아침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우랑가바드는 1600년대에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도시로 이곳에는 타지마할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비비까마끄바라’라고 부르는 묘소가 있다. 아우랑제브의 첫 번째 부인의 묘소이다. 형태는 타지마할을 닮았지만 그 예술성의 수준은 낮아 보인다.  
엘로라로 가는 중간에 1435년에 세워졌다는 ‘다울라따바드’ 성의 승전탑이  보인다.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탑으로 높이는 60m이다.
델리슐탄국의 하나인 ‘투글라크왕조’가 델리남부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만든 성이다. 검은 색채의 돌로 하늘 높이 쌓아올린 성들이 우거진 숲속에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참을 달려도 성터가 계속되는 것이 전성기에는 그 위세와 권력이 얼마나 당당하고 컸었나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엘로라 석굴사원 스케치_김석기 작가
엘로라 석굴사원 스케치_김석기 작가

아우랑가바드에서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 바로 데칸고원의 바위산 깊은 곳에 엘로라석굴이 있다. 엘로라 석굴은 6세기경 불교의 등장을 시작으로, 무려 500여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석굴은 모두가 34개로 2km에 걸쳐 펼쳐진다. 1번에서 12번 석굴까지는 불교석굴로 5-6세기에 만들어졌고, 13번부터 29번 석굴까지는 힌두교 석굴로 7-9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30번부터 34번까지의 석굴은 자인교 사원으로 8-10세기에 만들어졌다.  
엘로라 석굴의 특징은 유적들이 시대별, 종교별로 순서를 지키며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갈등이나 분쟁 같은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이곳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종교전시장 같다.   
불교 석굴로 들어서면서 거대한 공간과 웅장한 기둥에서 세밀하게 조각된 신을 향한 그들의 정성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보리수나무와 탑, 그리고 붓다의 조각상을 올려다보면서 아름답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며, 웅장하기도 한 예술작품의 신비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묘하게 구성된 1층과 2층의 연결 통로, 기도방의 배치, 모퉁이 모퉁이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품들 위에 나타난 그들의 재치와 솜씨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엘로라 석굴_김석기 작가
엘로라 석굴_김석기 작가

왜 자비를 내세운 자기 성찰에 의하여 해탈에 이르고자 했던 불교가 이곳에서 쇠퇴하고,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신의 은총과 명상의 과정을 통하여 욕망을 소멸시키고 무소유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힌두교가 성하게 된 것일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생겨난 순수하지 못한 사연들은 없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 석굴의 기둥을 어루만지며 이곳에서 숨져간 많은 이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석굴에서 종교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고, 우기에는 건조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었고, 별다른 건축기술 없이도 커다란 바위 속으로 파 들어가 원하는 크기만큼의 성전을 만들어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 기도도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엘로라 석굴에는 인도 석굴 사원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16번 석굴이 있다. 바로 ‘석굴사원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카일라쉬 사원(Kailash Temple)이다.
카일라쉬 사원은 거대한 암벽의 산을 파고 들어가 만들어낸 사원으로 신전이 좌우 대칭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기하리만큼 정교한 조각들, 탑과 성전, 그리고 기도방과 통로, 모두가 완벽한 계획 속에 조각된 한 덩어리의 예술품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하여 1.5배가 더 크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고, 이 사원을 건설한 방법의 문제이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것이 아니고, 큰 돌덩어리 속으로 파 들어가면서 대형의 사원과 조각 작품들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말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사원의 깊이가 86m, 너비가 46m, 높이가 35m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거대한 사원을 조성하는 가운데 제거된 돌의 무게만 20만t에 달했다고 한다.
이사원은 남인도의 건축양식인 ‘드라비다’ 양식을 활용하여 라슈뜨라꾸따 왕조의 크리쉬나 1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스리랑카에 사는 악마 왕 라바나(Ravana)가 카일라쉬 산을 뽑아버리려고 하자 쉬바 신이 엄지발가락 하나만으로 악마를 제압하는 장면이다. 구성과 표현의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옛날 왕조들의 횡포에 의하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예술품을 그저 아름답다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일까? 이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쳤을 석공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착잡해지기까지 하는 마음의 그늘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카일라쉬 사원을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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