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Vol. 6 영원한 청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다

상해의거

  • 입력 2018.07.23 15:22
  • 수정 2018.07.23 15:58
  • 기자명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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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폭음은 환상에 젖은 일제와 세계제국주의가 무너지는 조종弔鐘으로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여는 축포로서 인류의 평화와 양심을 외치는 웅변으로서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 표효하는 정의의 소리가 이에 더할 바 어디에 있으랴. 이를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上海義擧라 한다. 

                                  「천추의열 윤봉길 의사 숭모비문」 중에서

4·29 의거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4·29 의거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홍커우공원 의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아침식사 후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메고 길을 나섰다. 물통형 폭탄은 알루미늄제 물통 속에 폭탄을 넣고 끈을 통해 어깨에 멜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도시락형 폭탄은 알루미늄제 상자 속에 폭탄을 넣고 보자기로 감쌌으며 작은 구멍을 내고 발화용 끈을 내놓은 형태였다. 

홍커우 공원에 도착하자 상해거주 일본인, 상해파견 일본군과 각국 사절 등 3만 명이 모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일제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주중 총영사 무라이, 민단간부 토모노 등 일제의 군관민 수뇌부 7명이 도열했다. 

상해의거를 실은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932. 5. 28일자 보도(사진출처=(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상해의거를 실은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932. 5. 28일자 보도(사진출처=(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축하식 1차 순서로 관병식이 끝나고 2차 순서인 축하식순이 시작됐다. 일본국가 제창이 끝나갈 무렵인 11시 40분경 윤 의사는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물통형 폭탄을 들고 단상 위로 투척했다. 폭탄은 단상 위로 명중하며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다음날에, 시라카와 대장은 5월 26일 사망했다. 노무라 중장은 실명을 했다.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했으며 주중 공사 시게미쓰도 다리가 부러져 의족으로 행보하게 됐다. 민단간부 토모노와 주중 총영사 무라이 역시 큰 부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자폭하려 했으나 근처에 있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과 헌병들에게 제압되며 체포됐다. 체포 후 윤 의사는 공원 맞은 편 상해 헌병대 제1분대에 유치됐다. 10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윤 의사는 상해파견군 헌병대 본부로 이감됐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는 당시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상환하기를 요하면서 '제 시계는 작일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 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윤군은 입장의 길을 떠나는데 기차(자동차)를 타면서 소지所持 금전을 꺼내어 나의 손에 들려준다. '왜 약간의 돈을 가지는데 무슨 방해가 있는가.' '아닙니다. 기차세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즈음에 기차는 움직인다. 

나는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은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기차는 소리를 높이 지르고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하고 질치(달려감)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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