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Vol. 4 영원한 청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다

Vol. 4 윤봉길 의사의 망명 및 의열투쟁의 시작

  • 입력 2018.06.01 15:37
  • 수정 2018.06.01 16:44
  • 기자명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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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편지를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조국 위해 망명 다짐

존재의 조건에서 알지 못 했던 것_박형진 작가
존재의 조건에서 알지 못 했던 것_박형진 작가

윤봉길 의사는 1929년 열린 학예회에서 「토끼와 여우」라는 우화극을 공연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풍자화한 작품이었는데 윤 의사는 이를 계기로 극심한 사찰을 받게 된다. 윤 의사는 농민운동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으며 마침내 조국을 위해 망명을 결심한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섰다.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윤 의사의 망명 동기는 위와 같이 윤 의사의 자필 이력서에 드러난다. 또한,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상하이를 목적하고 부모형제, 애처애자와 고향 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라고 언급했다.“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섰다.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망명 직후에 중국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마음을 전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이상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자이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다.”

농민운동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농민운동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 만나다
윤 의사는 상하이의거 직후 일제 헌병대에게 심문을 받을 당시 한국독립을 위해 활동하려고 망명한 것이라고 응답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보고서에 의하면 윤 의사는 동포가 일본인에게 박해당하고 있음에 분개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은 자력으로 훌륭히 통지할 수 있는데도 왜 일본 통치하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세계 문명의 진보된 시점에 타국에 합병되어 있는 것이 치욕이라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또한, 신문에서 상하이에 독립운동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국독립을 위해 활동하려고 건너온 것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윤 의사는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45일 만에 풀려났다. 윤 의사는 칭다오에 가서 동포가 경영하는 사업장에 취업을 했다. 이후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 윤 의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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