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해법인문학 중용

<인공지능과 중용 1>

  • 입력 2018.05.08 12:30
  • 수정 2018.05.15 17:36
  • 기자명 고리들 <인공지능과 미래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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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프리먼'은 노동경제학의 대가이며 하버드의 석좌교수이다. 그는 로봇이 거의 모든 인간의 분야에 진출할 것이며 가격이 저렴해질 것이라고 했다. ‘리처드 프리먼’도 ‘빌 게이츠’가 칼럼에서 강조한 로봇세를 언급했는데 ‘빌 게이츠’와는 달랐다. 2016년 로봇산업진흥원 자문위에서 필자가 주장했던 그 방향과 같았다. 필자는 2016년 한국의 로봇세는 생존에 급급한 한국 기업들에게 이중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로봇 도입으로 생존하려는 기업을 괴롭히지 말고 로봇산업의 역량을 장애인 고령인구 보조로봇 연구에 온 힘을 써야 희망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번 정부에서 일부 채택된 정책이 되었지만 실행력은 다음 정권에서 나올 것이다. 
왜 로봇세 정책은 한국과 미국이 달라야 할까? 로봇 수입국과 로봇 수출국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은 로봇도 수입하고 로봇세도 내야 하니 이중고가 된다. 미국은 로봇을 수출하니 로봇제조 일자리까지 더 길게 유지되므로 로봇세를 재취업교육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빌 게이츠’의 주장이 어느 정도 맞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의 운명은 ‘리처드 프리먼’의 주장대로 로봇세는 대량실업 대책에 쓰여야 할 것이다. 그는 교육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교육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그의 주장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가? 교육은 오히려 해당 분야의 임금을 낮출 뿐이다. 수많은 변호사들이 길거리 노숙자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보다 더 나은 직업을 위해 공부하고 비싼 교육비를 지출했지만 노동자로서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더니 이내 더 빨리 가난해지는 현상이 바로 공부리스크이다. 교육과잉이 오히려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교육과잉에 대해 필자가 만든 별명은 ‘교육당뇨병’이다. 교육당뇨병을 치료하자는 강연에서 난 ‘중용’을 끄집어냈다. 학문이란 이름의 기원으로 알려진 중용의 ‘박학심문博學審問’은 ‘신사명변독행愼思明辯篤行’으로 끝난다. 그런데 마무리가 독행으로 끝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음식을 잔뜩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아서 걸리는 당뇨병처럼 교육당뇨병이 된다. 결국 췌장이 망가지게 되는데 췌장이 망가지면 인슐린이 나오지 않아서 체내 에너지를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즉 에너지를 쓰는 창의성과 유연성이 사라진다. 인재는 둔재가 되고 리더들이 ‘늬들’이 된다. 오래전 광고에서 들은 ‘늬들’은 게 맛을 모른다. 맛을 모르면 멋도 역시 모른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에 대해 100회 이상의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청 강의도 들어왔다. 교육청 장학사들 대상으로는 더욱 흥분하여 동아리형 교육 개편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러다가 중용이라는 고전을 자주 인용하는 나를 발견했다. 결과적으로 교육청 강의는 이내 끊겼다. 필자의 주장을 지금 공교육에 적용하기에 난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주장한 중용은 인공지능 시대의 해법인문학임에 틀림없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으니 중용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해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중용中庸을 처음 읽은 때는 중학생 때였다. 대략 35년 전, 가난한 집 아들로서 무학으로 오리를 키우던 숙부는 월남전에서 아비를 읽은 어린 조카에게 늘 ‘대학중용’을 읽으라고 강권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 여러 번 읽었을 대학중용에 대한 신앙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런 신앙심은 반작용이 생긴다.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대학중용은 지루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 이후 대학에 가서 다시 대학중용을 강조하는 선배들을 만났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배들이 강조한 대학중용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과 ‘지어지선止於至善’에 대해 수십 수백 번 사색하며 진화심리학과 뇌과학과 미래학을 공부하며 ‘지피지기知彼知己’에 힘썼다. 신독愼獨과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경지는 일단 저 멀리 두고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집착했다. 

20대에 연애를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대학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연애실종이 되었다. 정말로 격물치지를 통해 민족적 과업인 민족중흥을 하고 싶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20대에 연애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후회했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보다는 추상적인 연애의 대상을 찾게 되는데 책과의 연애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청춘이다. 아파서 청춘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아직은 과문해서 청춘이다. 20대 연애를 금기할 만큼 천명과 지어지선은 여전히 나의 지속적 화두이다. 그리고 ‘솔성率性’과 ‘수도修道’는 내 지속적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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