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Vol. 2 영원한 청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다

Vol. 2 윤봉길 의사의 민중교육운동

  • 입력 2018.03.30 14:58
  • 수정 2018.03.30 15:48
  • 기자명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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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오치서숙을 졸업하기 전인 17세, 18세 무렵의 2년간 자신의 사랑방에 차린 서당에서 아동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나무 묘표를 여러 개 뽑아 들고 와 자신의 아버지의 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자를 읽지 못하던 까닭이었다. 윤 의사는 그 청년의 아버지 묘표를 일러 주었으나 묘표들을 뽑은 자리에 아무 표시를 하지 않아 다른 이들의 묘까지도 구분할 수 없게 된 일이 있었다. 윤 의사는 이 일을 계기로 계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야학당 설립해 문맹 교육 힘써
오치서숙 수료 후 윤 의사는 19세가 되던 1926년 친구들과 야학당을 설립해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1926년 당시는 조선일보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1931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는 등 문맹퇴치운동이 활발히 펼쳐지던 시기였다. 

윤 의사는 야학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야학의 학습내용을 더욱 충실히 할 것과 독서를 활성화할 것을 방안으로 내세웠다. 또한, 한 달에 한 번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해 평가와 함께 의견을 개진하기로 했다. 

농민운동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농민운동 기록화_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윤 의사는 문맹자들을 모아 갑, 을의 2개 반으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했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해 신지식 향상에 힘을 썼다. 윤 의사는 우선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사촌동생 윤신득(윤은의)에게 책을 송부해줄 것을,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정종갑에게는 신간 잡지 등을 기탁해줄 것을 부탁하며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 배재고보를 졸업한 윤세희에게는 강사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회원들은 책을 읽고 토론을 계속하며 지식을 쌓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한편 역사와 지리, 산술, 과학, 농사지식 등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야학은 당시 글자를 가르치는 일을 넘어 한국사와 한국문화를 전하는 활동 또한 계속했다. 조국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높이는 데에도 노력했다. 

(사진출처=(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출처=(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농민독본』을 집필하다
윤 의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농민독본』이라는 교재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농민독본』은 1권인 「조선글편」, 2권인「계몽편」, 3권인 「농민의 앞길편」으로 나뉜다. 「조선글편」은 훈민정음 등 한글의 기본을 소개하고, 「계몽편」에서는 인사투 등 반드시 알아야 할 예절과 더불어 백두산과 조선지도 등 조국의 강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며, 조선 청년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담았다. 「농민의 앞길편」에서는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을 다뤘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농민이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윤 의사의 사회의식이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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