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영원한 청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다

Vol.1 윤봉길 의사의 어린시절

  • 입력 2018.02.28 17:43
  • 수정 2018.02.28 20:59
  • 기자명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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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의 일왕 생일에 일제 군관민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 의사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윤황(尹璜)과 어머니인 경주김씨 김원상(金元祥)의 맏아들이었다. 윤 의사의 어머니 김 씨는 어느날 용 같은 큰 구렁이가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파평(坡平) 윤씨 31세손인 윤 의사는 어려서부터 체력이 좋고, 사리 분별이 명확한 영특한 아이였다고 알려진다. 용맹스러운 기질이 있었으며 대장감이라고 불렸다.

국내 박람회에서 고객들의 호응
국내 박람회에서 고객들의 호응

윤 의사는 1911년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이사했다. 6세 때에는 큰아버지 윤경에게 한문을 배우기도 했다. 윤 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척하며 자퇴하기에 이른다. 이후 1920년 13세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동아일보, 개벽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했다. 1921년 14세 서당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공부했으며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윤 의사는 1922년 15세 때 성주 배씨 용순 여사와 결혼했다.

윤 의사의 자는 용기(鏞起), 본명의 윤우의(尹禹儀)였으며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는 서당을 마칠 무렵,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 선생에게 받은 것이다. 윤 의사의 조부는 근면 성실한 농부였으며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부농에 속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발자취에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원효봉'은 윤 의사가 소년 시절부터 가까이하던 곳이었다. 윤 의사는 1926년부터 농민계몽 및 독서회운동 등의 농촌사회운동을 펼쳤다. 농촌에서 나고 자라며 농촌사회를 경험한 윤 의사가 훗날 농촌계몽활동을 해나간 것은 다분히 필연적이라 보인다.

<사람은 왜 사느냐>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주가 되는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택하였다.

- 1930년 10월 18일 칭다오에서
  윤봉길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서신에서 평소 자신의 신념을 전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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