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깃든 100년의 명품기업을 꿈꾸다, ENEX 에넥스 _ 박유재|ENEX 에넥스 회장

  • 입력 2013.06.13 14:13
  • 수정 2017.02.09 17:55
  • 기자명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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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깃든 100년의 명품기업을 꿈꾸다, ENEX 에넥스
대한민국 가구산업을 이끌어온 42년간의 창업가 정신

박유재|ENEX 에넥스 회장 

 
 

 박유재 에넥스 회장은 ‘설거지통’이란 말밖에 없던 70년대 시절, 처음으로 ‘입식 부엌’이라는 개념을 한국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로써 국내에는 주방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주부들은 허리를 펴고 설거지를 하며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지금이야 입식 부엌이 대중화되면서 서서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이 당연시 생각되지만, 당시만해도 아궁이 불을 지피거나 혹은 연탄불에 요리하며 앉아서 설거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처럼 국내 주방 문화의 혁신을 선사한 박유재 회장을 만나, 40여 년 넘게 우리나라 가구 산업을 이끌어온 드라마와 같은 그의 성공 신화를 담아보았다.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마음 아파 만든 걸작, ‘오리표 싱크’
 대학 시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삼중물산 박진권 사장에게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무역회사이던 삼중물산의 박 사장은 동향(同鄕)의 고학생들에게 월 5000원씩 장학금을 a지원했다. 고향이 같다지만 일면식도 없는 풋내기에게 흔쾌히 장학금을 지원해준 게 고마워 박 회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삼중물산에 나가 일을 도왔다. 이를 계기로 박 회장 역시 사업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미래의 꿈나무를 위한 장학금 후원을 계속적으로 펼쳐오고 있다.
박 회장의 원래 꿈은 과학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역 일을 도우면서, 무역은 박 회장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였고, 특히 사업이란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를 눈여겨본 삼중물산 박 사장은 그에게 졸업 후에도 계속 회사에 나오길 권하며, 정식 입사를 제안하였다. 그렇게 삼중물산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디딘 박 회장은 1961년 회사를 나와 독립했다. 그 때 나이 겨우 스물일곱. ‘웅우상사’를 시작으로 ‘제일도기’라는 상호를 내걸고 외국의 도기를 수입해 국내 도기상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외국의 많은 선진 가구와 부엌 가구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조업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박회장은 “외국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가보면, 부엌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어머니는 물론 한국의 모든 여성에게 외국의 부엌을 통째로 들고 가 선물하고 싶었습니다.”라며 당시 선진 부엌가구를 접한 소감을 전했다.

 
 

 

 

▲그랜드 스퀘어
▲그랜드 스퀘어

“혼이 깃든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박회장이 처음 ‘싱크대’라는 것을 만들겠다고 할 때 주변에선 모두 만류했다. 1960년대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87달러밖에 되지 않았고, 정부는 대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이 한창이었다. 때문에 중소기업으로, 그것도 생전 처음 듣는 ‘싱크대’라는 것을 만들겠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간주해버렸다.  
 “그 땐 싱크대라는 말도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자숫물통, 개수대, 설거지통이라고 말해야 겨우 알아듣곤 했었죠. 쪼그린 채 앉아서 설거지를 해 온 사람들이라 일어서서 설거지를 어떻게 하냐며 상상도 못 할 정도였으니까요.”라며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주방’이라는 단어 자체도 ‘싱크대’라는 단어가 보편화되기 전까진 생소한 단어였고 ‘주방 문화’라는 말은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이미 ‘제일도기’社를 운영하고 있던 박 회장으로서는 단순히 돈벌이 수단만 생각한다면 생소한 싱크대 제조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1년 4월, ‘오리표 싱크’의 전신(前身)인 ‘서일공업사’를 창업하면서 싱크대 제조업의 창시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이런 도전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제일도기’라고 하면 서울에서 첫 번째로 꼽는 회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유통업이고, 남이 만든 물건을 수입해 다시 팔아먹는 장사에 불과했습니다. 명색이 사업 한다는 사람이 자기 정신과 혼이 들어있고, 사상이 담겨있는 자기 제품을 만들지 않고 유통업으로 돈 좀 번다고 큰 소리 쳐봤자 어디 성취감이나 맛볼 수 있겠어요? 속이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말처럼 쉬웠던 건 아니었지만, 혼이 깃든 나만의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는 무엇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라며 박회장은 회고했다.

 

▲모닝핸들리스 내추럴
▲모닝핸들리스 내추럴

부엌가구의 여명기 1970년대,
그리고 싱크대의 대명사로 군림한 1980~90년대  

 그의 나이 30대 때 그는 일본의 건설 경기에 주목했다.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며, 우리나라 경제가 일본의 경제 발전과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감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 때 정부는 일자리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졌고, 국내의 유휴 노동력을 움직이기 가장 손쉬운 방법은 건설경기 활성화인데, 일본도 그랬듯 우리나라도 아파트를 건설할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파트라는 개념도 전혀 일반화되지 않고 있던 때였지만, 아파트는 주방가구 산업과 직결된다는 점을 그는 유의 주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류를 앞서 읽고 있었던 박 회장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미 생산설비와 체제를 갖추고 품질 향상과 생산성 향상에 주력하고 있을 때, 여의도에 아파트를 대량으로 짓는 건설 붐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점차 확대되어 강남 등지에 하루가 멀다하고 아파트가 올라갔다. 이러한 아파트 붐은 곧 싱크대 붐으로 이루어졌다. 부엌문화의 개혁이 시작되던 때였으며, 미리 만반의 준비하고 있던 박 회장에게 행운의 여신은 어김없이 찾아와 미소 지었다.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박유재가 싱크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사업성이 있어 보였는지 싱크대를 보지도 못한 친구들이 덤비기 시작했죠. 잘해보라고 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항상 경쟁자가 있어야 성장하기 마련이고, 그걸 누구는 적이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경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진짜로 여기저기 군소업체들이 싱크대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고, 그래도 내버려뒀습니다. 우린 품질 하나만으로도 충분이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그가 이렇게 진작부터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척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 미래를 앞서 내다보는 사업 감각. 이뿐 아니라 그에게는 오랜 멘토이자 조력자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오리표싱크- 황간공장준공 (1978)
▲오리표싱크- 황간공장준공 (1978)

평생의 멘토이자 조력자, 일본 와코社 니시다 회장과의 우정 
박 회장이 부엌가구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만해도 생산 공정이 영세해 표면이 매우 거친 제품이 만들어졌다. 표면을 사포로 갈았기 때문인데, 박 회장은 이를 위해 거금을 들여 일본 와코社의 연마기를 수입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 와코社의 니시다 야스마루(西田泰丸)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느 인터뷰에서 니시다 회장은 당시의 박 회장을 회상하며 “첫 대면에서부터 박 회장은 젊고 열정적인 사업가로 인상이 남았었는데, 그 뒤로 우리는 사업 파트너이자 형제처럼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이후 국경을 넘어 오랜 우정과 인연을 이어가며 니시다 회장은 박 회장이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인생의 선배로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박회장은 “한 때 사는 게 재미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기업 축에 들던 국제상사가 ‘거북표 싱크’를 만들어 부엌가구 시장에 진입했거든요. ‘이제 우리 오리표 싱크는 어떡하나, 무슨 수로 대기업의 자본 공세를 감당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는데, 마침 한국에 머물고 있던 니시다 회장을 찾아가 새벽 2시 사우나 실에서 알몸으로 고백했습니다. 세상 살기가 싫어 졌다고..”라며 니시다 회장과의 일화를 전했다.
 그런데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니시다 회장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고, 이렇게 베푼 사랑의 마음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했다.
 “니시다 회장 자신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한 적이 있다면서,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라고 하더군요. 저한테 가장 가까운 존재였지만, 사업한다고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가족들. 이러한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챙기자 가족들이 기뻐했고 저 역시 그 모습을 보니 마음에 변화가 점차 찾아오기 시작했답니다. 또한 직원들에게도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고 회사 분위기 역시 환해졌답니다.”라며 니시다 회장이 말한 ‘사랑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국회의원 당시
▲국회의원 당시

지금의 ‘ENEX (에넥스)’로 제 2의 도약에 나서  
 올림픽을 계기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오리표 싱크’는 92년, 기업이미지 통일화 작업(CI)을 통해 제 2의 도약에 나섰다. 인지도가 높고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오리표’ 브랜드를 뒤로 하고, ‘에넥스(ENEX)'라는 신규 상호로 바꾼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맞춰 제품과 기업문화 이미지를 통째로 바꿔야 제2의 도약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에넥스(ENEX)는 더욱 강화시킨다는 뜻의 'EN~'에 '오랜 경험(Experience)', '전문가, 장인(Expert)', '최고, 최상(Excellent)'을 나타내는 'EX~'를 합성한 것으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최고를 지향하는 회사의 이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에넥스는 고객에게 최고의 제품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나은 생활과 인간 행복, 환경 친화적인 공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있다.
또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선도하는 에넥스는 ‘디자인, 레이아웃, 인테리어, 컬러 등을 아우르는 예술 감각의 ‘하이터치(High Touch)’와 친환경, 위생, 첨단 기능을 포함하는 첨단 과학의 ‘하이테크(High Tech)’를 통해 차별화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업계 최초 11년 연속 ’품질 경쟁력 우수 기업‘,  6년 연속 ’고객 만족도 1위‘, ’우수 산업 디자인 상‘을 석권하는 등 우수 실적과 기술, 역사를 자랑할만하다.

 

▲대학 강단 강의 모습
▲대학 강단 강의 모습

자신의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었던 창업가,
2세 경영권 승계로 창업정신과 경영철학의 대를 잇다  

 박 회장은 장남인 박진규 부회장을 통해 2세 경영을 이어가는 중이다. 외부적으로 볼 때 2세 경영을 당연시 여길 수 있으나, 여기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창업자의 온전한 창업 정신과 추구해 온 삶의 목표, 경영 이념과 철학 등을 이어 가는 것이 기업을 잇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때문에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것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2세 경영을 이어가는 것이 회사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발전과 인간 행복에 부흥하고자 한 박회장의 창업 정신을 이어 박진규 부회장의 리더십과 기업가정신의 발현을 통해 에넥스는 다시 한번 가구업계 1위 탈환을 목표로 오늘도 정진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실천과 반복만이 대가를 만든다’는 박회장의 말처럼 끊임없는 도전과 개척을 통해 100년 후에도 우리 곁에서 새로운 가구 역사를 이끌어 갈 에넥스의 모습을 기대한다.

 

▲에넥스황간공장전경(제1공장)
▲에넥스황간공장전경(제1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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