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향기로 한국 기독교에 본질을 묻다 _ 황수석|안양 청암교회 목사

  • 입력 2013.06.11 17:24
  • 기자명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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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향기로
한국 기독교에 본질을 묻다

소통과 나눔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작지만 건강한 교회  


황수석
|안양 청암교회 목사

 

 교회의 대형화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의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 잡았었다. “교회의 대형화가 선교와 구제에 효율적이다”며 대형 교회들은 교회 대형화의 순기능을 주장하고 교회성장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 시켰다. 이렇듯 대형교회들의 몸집불리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요즘, 기성교회들과는 다른 행보로 주목을 받고 있는 교회가 있어 찾아가 보았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경기도 안양 시 아파트 단지를 지나 후미진 골목에 들어서니 작은 교회가 하나 보인다. 교회는 오래되고 허름해져 마치 곱게 늙은 노인을 연상시켰다. 교회 옆에는 ‘로뎀 나무’라는 나무푯말이 바람에 살랑거렸고, 아기자기하게 핀 꽃들의 향내가 감돌았다. 꽃들로 둘러싸인 ‘로뎀 나무‘ 쉼터 안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갑자기 찾아온 봄의 더위를 식히고 계셨다. 교회에서 직접 만든 목조 테이블과 의자가 소담하게 놓여있고 안에 들어가니 꽃내음은 더 진동했다. 학교를 마치고 엄마와 아이가 앉아 쉬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 둘 모여 재잘거리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작지만 부족함이 없는, 또 하나의 천국이 바로 이곳에 숨어있었다. 조금 뒤 배추를 양쪽 손에 들고 숨 가쁘게 올라오시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이 곳, 청암교회 담임 목사인 황 수석 목사였다.

 청암교회는 등록교인이 약 600여명이 되는 작은 교회다. 신도 수가 수만 명에 달하는 최근의 다른 대형 교회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그러나 황 수석 목사는 요즘의 기독교 흐름과 달리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누구의 비전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교회를 오셔서 둘러보셨겠지만 시설도 오래되고 많이 열악한 편입니다. 이 시설로 600명을 수용한다는 것도 사실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죠. 예배당도 다른 교회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좀 허름한 편이고. 하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권위적인 의식도 없이, 목사와 성도가 더 가깝게 다가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시설을 갖추고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또 그것대로 좋겠지만, 청암교회가 목표로 하는 교회상은 작지만 건강한 교회입니다.”   

 1993년 황 수석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래 청암교회는 독거노인 가정에 과일바구니와 김장김치를 전달하고 저소득가정에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 작년에는 양배추와 쪽파를 15톤씩 후원 받아 지역 주민들에게 나눔 잔치를 열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 정신을 사회봉사 활동으로 실천함과 동시에 주민들과의 소통과 나눔에 노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이런 다양한 지역주민들과의 허물없는 왕래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봉사의 핵심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영향력, 활발한 해외 선교를 펼치다
 작은 교회이지만 그 영향력은 전 세계적이다. 전 교인이 선교사라는 말이 돌 정도로 청암교회의 해외 선교사역은 그 규모와 조직 면에서 어느 대형교회에 못지않다. 러시아를 비롯해 남아공, 중국, 몽골, 인도, 일본, 우간다 그리고 파키스탄까지 10여 개국에 구호물품과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선교활동에 제약이 심한 중국에서 황 목사는 ‘한중기독청산신학교’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사장 겸 교장을 맡고 있다. 80% 이상의 재정을 청암교회가 담당하고 나머지는 노회와 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다.
 “한중기독청산 신학교는 평북노회 인준 신학교로 지금까지 18명의 목사를 배출해냈고 40여 명의 학생들이 신학의 길을 걷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중국 내 400여개의 예배처소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죠. 현지인들이 완전히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선교와 지원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중국 뿐 아니라 몽골에서의 선교사역 역시 빛을 발하고 있다. 약 15년 전에 세워진 몽골 할렐루야 교회는 몽골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몽골 전체 인구가 약 290만이라 하는데, 약 1500여명의 교인이 있다니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 외 남아공의 학생후원, 루마니아 집시선교 뿐 아니라 국내의 어려운 미자립 교회들까지 직간접적으로 후원 중에 있다.

파키스탄에까지 흐르는 믿음의 샘물 
 작년에 황 수석 목사는 홀로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파키스탄은 대표적인 이슬람국가로 무슬림이 인구의 97%에 달하고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신성모독죄가 엄격한 나라로 기독교 선교에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위험한 곳이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들 역시 그동안 크리스천을 위한 사역 외에 무슬림을 위한 복음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었다.
 “사회적 분위기는 위험이 많은 편이죠. 평상시에는 그 지역 전통 복장을 하고 돌아다녔어요.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일하는 것은 위험한 면이 있으니까요. 법이나 질서가 거의 무시되고 치안이 거의 없는 사회라고 보면 맞아요. 충동적인 행동이 많이 벌어져서 치안당국 역시 손을 쓰기 힘든 순간이 많은 곳입니다. 97%이상 무슬림이지만 그들이 종교를 깊은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기보다는 그저 관습적으로, 생활 속에서 체화되거나 맹신하며 자라온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 나라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육이 급선무라고 느꼈습니다”

 황 목사가 처음부터 파키스탄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 와서 공부하는 파키스탄 목회자 부부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지금의 선교에 시작이 되었다. 그들에게서 조국의 실상에 대해 듣고 ‘어떻게 하면 파키스탄을 위해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겠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11년 당시에는 선교물품 가방, 옷 등을 30kg 박스에 약 30여개를 담아 배편으로 보내는 것으로 시작, 계속되는 교제와 파키스탄 목사 부부가 조국에 돌아가 선교활동을 지속한 결과 현재는 약 500여 명의 현지인 분들이 개종을 하게 되었다. 실로 엄청난 숫자다. 2012년 말에 황 목사는 복음이 전파된 그곳에 직접 방문하여 그 지역에 필요한 급수시설인 우물 18개를 개설하였다.
 “파키스탄은 새로운 선교전략을 가지고 올인(all-in)해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파키스탄에서는 NGO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주거시설 보급, 이른 바 집지어주기 운동이라든지 생활개선 운동, 교육봉사 등의 활동을 많이 합니다. 저 역시 그런 NGO적인 활동을 통해 현지인들의 실생활과 깊이 결부되고 또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천덕꾸러기의 회심(回心)  
 황 수석 목사가 처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까지는 한편의 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 수많은 에피소드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 했던 형의 그늘 아래, 황 목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상 공부를 해 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는 겉돌았으며, 또 교회에서는 심한 장난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내에서 물품 하나가 없어지고, 물품 도둑의 주인공으로 황 목사가 지목되었다.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황 목사는 교회 강단에 서서 목사님께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황 목사는 그 반감으로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그만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오기였다.
 그러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돌아간다. 흑심 가득했던 시작이었는데 성경공부에 몰두하는 황 목사를 보고 주위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변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성경 말씀은 읽을수록 마음이 동하고 오묘함을 느꼈다.
 황 목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인정받는 것의 좋은 느낌, 안정감, 평안을 경험하면서도 내적으로는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심란했던 내적 회개를 마치고 그들에게 가서 처음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게 되었지만 그들 역시 등을 돌리기보다는 끊임없이 황 목사를 지지하고 격려했다. 황 목사의 믿음 그리고 지금의 사역이 있기까지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용서와 격려가 큰 밑거름이 되었다.

빚진 자의 빚 갚음, 더 큰 풍성함을 누리는 길  
 그 이후에도 황 목사의 인생에 고난의 순간은 여러 번 찾아왔다. 너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의 길에서 비켜가 포기하고 있을 때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해주는 분들 덕에 검정고시를 볼 수 있었다. 월남 파병 참전 당시엔 매달 나오던 파병수당을 모두 부모님께 송금했으나, 제대 후 그 돈을 전해주기 위해 가지러 나간 아버지께서 도박으로 3일 만에 모두 날리고 빚까지 지고 오셨을 때의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이후 맨 몸으로 결혼하고, 안양의 작은 농촌마을에 와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특수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나 어느 날 강풍으로 인해 모두 날아가고 겨우내 애지중지 길렀던 농작물들은 모두 얼어 벼렸다. 살 소망이 끊어지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기도하러 갔어요. 저는 완전히 거지가 되었고, 살아갈 힘이 없었는데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권면해주셨죠. 일주일동안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부를 때까지 너는 가서 기다려라’라는 음성이 제 마음에 찾아오는 것을 느꼈어요. 마음에 어느 정도 평안이 깃들고 4개월 정도 지났을까요. 어느 날 목사님께서 부르시더니 외국 항공봉투 하나를 내미시더군요. 발신인 주소나 성명은 없었고, 수신인은 당시 다니던 군포교회 앞으로요. 내용을 읽어보니 미국에 있는 그 분이 4개월 전부터 기도를 했는데 자꾸만 한국의 이 교회가 떠오른다는 거에요. 잘 알지도 못하는 교회인데.. 계속 기도하는 중 ‘이곳에 네가 후원해줄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가 자꾸만 강하게 들었다고 하더군요. 넉 달 동안 고민을 하다가 이 편지를 보낸다면서 후원금을 보내주셨어요. 그 분 덕분에 제가 7년간의 대학과 대학원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고, 목사가 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평생 ‘빚진 자’에요. 죽을 때까지 그걸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겁니다.”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면 밝은 새벽이 찾아오는 것처럼 고난의 순간 역시 그렇게 지나갔다. 빚진 자로서의 빚 갚음을 강조하는 황 수석 목사. 그는 여전히 갚아야 할 빚이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에 풍성함을 안겨준다고 고백한다. 그는 행복해보였다.  

한국의 메가처치(megachurch) 현상에 대안을 제시하다 
 황 목사가 지금까지 이끌었던 청암교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메가처치’라 불리는 현상 위에 놓여있다. 메가처치는 그리스어로 '크다' 혹은 '백만'이라는 뜻의 메가(mega)와 교회(church)의 합성어다. 한마디로 '대단히 큰 교회'라는 뜻이다. 메가 처치 현상이 한국교회의 부패와 무능, 타락의 주원인이라며,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크기가 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교회가 대형화를 넘어서 쇼핑몰화되는 세태를 보며 강도 높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생겨난 것이 ‘건강한 작은’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로 교회의 분가, 예배용 건물의 일요일 대여 등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안양의 작은 교회, 청암교회 역시 지역주민들과의 나눔과 소통 안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기독교의 본래 비전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여 해외선교에 힘쓰고 있다. 가장 교회다운 교회, 교인 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본래의 교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오늘, 이 청암교회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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