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

  • 입력 2013.06.10 14:48
  • 기자명 이문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
철저한 대응태세만이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다

6.25 전쟁의 배경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휴전협정)까지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당사자는 남한과 북한이었지만 내막에는 복잡하고 치열한 국제정세가 연관된 성격이었다. 일제치하에 놓여 있던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약속받았는데, 일본군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를 명목으로 북위 38°선, 즉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분할 주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를 위한 잠정적 경계로 생각했지만, 소련의 속내는 38선을 영구적 경계로 만들어 그 위 지역을 소비에트화 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계획대로 소련은 남북간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키고 통일정부수립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 정치적 분단을 강요했다. 한반도 통일을 시도했던 미국도 소련과의 합의에 번번히 실패하자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성급한 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맙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UN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가 실시돼 제헌국회가 구성됐으며, 북한 지역에서는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찬성은 백색 투표함에, 반대는 흑색 투표함에 기표하도록 해 사실상 반대 투표가 어렵게 함)'에 의해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이후 남북간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북한은 여러차례 남한에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계속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최종 수단으로 전면적 남침을 결심하게 된다. 소련의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의 막대한 군사력에 비해 남한의 군사력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 군사력 균형은 급속히 무너지게 됩니다. 여기에 이른바 ‘에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이 뒤따르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방치되었다고 오판하게 만들었다.

전쟁 발발…북한의 기습과 퇴각을 거듭하는 남한 국방군
6.25 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북한의 대규모 병력에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가 있었음에도 군 수뇌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했고, 마침 주말을 맞아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전방부대 사단장을 포함한 장교들도 이날 저녁 파티에 취해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은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했지만 위의 모든 상황은 남한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울이 함락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서울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자신은 특별열차를 이용해 대전으로 피신했다. 서울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비로소 대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가 북한군의 한강 이남 진격을 우려해 하나뿐인 한강철교를 폭파하면서 대피도 불가능해졌다. 서울시민 144만6천 여 명 가운데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기 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 명에 불과했다. 한강철교를 폭파했음에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한편,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은 UN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고, UN 안보리는 결의문 채택을 통해 북한에 남한 영토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 회원국이 UN군을 조직해 6.25 전쟁에 참전, 전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게 됐다.
UN군 참전 초반에는 국지전에서 북한군에 밀리는 등 패전을 거듭했지만,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가 뒤집혔다. 한국군은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만인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고(서울수복), 계속 북진해 10월 26일 압록강, 11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했다. 한국군에 의한 북진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국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고 나면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북한을 지원하게 되었고, 인해전술을 바탕으로 한국군과 미군을 공격해왔다. 한국군과 미군은 다시 38선 이남으로 밀려내려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다(1.4 후퇴).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1월 말 다시금 공세를 가해 서울을 재탈환, 이후 남북 군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방어선을 치고 치열한 국지전을 벌이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밀고 당기기만 계속되는 성과 없는 전쟁이 고착화되자 미국은 휴전을 희망하게 됐다. 비열한 침략자를 응징했다는 명분은 이미 세웠고, 6.25 전쟁이 더 이상 확대된다면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짙었다. 막대한 인력 및 국력 손실로 전쟁 수행능력 고갈 상태에 처해 있던 북한도 정전을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휴전에 반대했다.
북한의 요청으로 UN군이 정전을 승인하면서 휴전협정이 시작됐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간의 6.25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양측은 일단 휴전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해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로 했으나 지금까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초토화된 대지’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쟁은 남북 모두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인명피해는 약 450만명(남한-200만, 북한-250만)으로 추산되며, 20만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여명의 전쟁 고아, 1천여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 22만8천여명, 미군 5만4천여명, 기타 UN군 3천여명 등이다. 전쟁기간 중 한국은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의 80%, 가옥의 절반이 완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휴전은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것으로, 사실상 남과 북은 아직 전쟁 중이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꿈꾸며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핵무장이 사실화 되면서 한반도의 불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 전쟁을 대비해 훈련을 거듭해온 국군과 적과 우방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있기에 북한의 무력도발이 그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북한의 남침 이후 어느덧 63년의 세월이 흘렀다. 항상 전쟁을 외치는 북한의 광적인 전쟁예찬으로 인한 불안한 정국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항상 6.25전쟁의 의미와, 당시 산화한 국군 영웅들의 각오를 잊지 말아야한다.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