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깎다, 마음을 닦다

최형준 작가의 꿈을 향한 끝없는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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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63X65X30, 오석)
가족(63X65X30, 오석)

작가는 16살의 이른 나이에 조각칼을 잡은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석재와 멀어져 본 적이 없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수없이 석재를 두드려온 덕분에, 그의 손은 어느새 강인한 훈장으로 가득 차 있다. 마주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굳은 손길은 최 작가에 깃든 장인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애로우면서 근엄한 어머니와 같이 따스하면서도, 아버지와 같이 위엄을 잃지 않은, 그런 석상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망치질을 하며 보낸 세월이 어언 50년 가까이 흘렀네요. 하지만 아직도 온연한 온기를 이 차가운 돌덩이에 옮기기엔 제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내 생애 가장 만족할만한 석상 하나 만드는 게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촛대와 향로가 있는 벼루(73X35X26, 영천석)
촛대와 향로가 있는 벼루(73X35X26, 영천석)

학업 및 돈과 바꾼 천직

최 작가는 국민학교 졸업 이후, 14살이 되던 그해 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사회로 나와야만 했다. 6학년 어느 여름날, 아버지의 갑작스런 별세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 야만 했던 최 작가의 가슴 아픈 사연이 그러했고,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할 책임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그 또한 여느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일터를 옮겨 다니며, 생활을 영위했다. 목공소, 우산공장, 시계방 등 기회가 주어지면 일단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과 적성에 맞지 않아 짧게는 3달에서 길게는 1년여 정도 일을 하고 그만두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장차 기술을 배워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자신의 적성에 맞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조를 배워보라는 어머니의 제안이 있었다고, 그는 문득 어린 시절 보따리장수였던 어머니를 따라 대구 하양에 나간 일을 떠올렸다.

생명(50X115X32, 오석)
생명(50X115X32, 오석)

“그 시절 어머니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돌다리 밑에서 다리 기둥에 새겨진 문양을 더듬으며, 참으로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불현듯 그 일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그의 나이 16살, 날짜도 생생하다. 1972년 10월 3일,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지금 대구 대명동 계명대학교 지역의 석재공장에서 처음으로 석조기술을 배우게 된다.3년의 세월 동안 비록 무일푼으로 일해 왔지만, 난생 처음 배운 돌 다듬는 일에 재미를 느끼며 정말로 남들보다 2배, 3배 더 열심히 하며 기술을 익혔다.

그로부터 3년 하고도 15일을 더한 ‘10월 18일’. 19살의 어느 가을날, 그는 자신의 스승이 양복 한 벌과 석조도구를 살 돈을 쥐여주며, ‘이제 떠나도 된다’고 하셨던 그말씀을 잊을 수 없다며,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과 스승의 바람대로, 여러 공장을 오가며 난이도 높은 어려운 작업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서 받은 수입으로 돈을 모아, 금세 고향땅에서 자신의 공장을 세울 만큼 나름의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22살 어느 날, 또다시 그의 눈을 뜨게 할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놀러 가는 길이였는데, 문득 그의 발길을 멈추게 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자신이 5여 년 동안 돌 다듬는 일에 정진하고 몰두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돌사자상과 불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당시 그는 자신의 실력이 부끄럽다 느끼며, 더 정진해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고향 땅에 돌아와 공장 등 여태껏 자신이 일궈둔 모든 걸 정리하고, 이조형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힘든 수련의 길을 나아가게 된다.

“그때 그저, 막연히 제 부덕한 실력을 좀 더 가꿔야 한다는 생각에, 앞뒤 겨를 생각없이 상경하게 됐는데. 근 1년 6개월간 이조형 선생님의 제자로 있으며 많은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또한 저를 어찌나 어여삐 여겨 주시던지, 우리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제 형편을 헤아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매월 40만 원을 저희 집으로 부쳐주시곤 하셨죠. 그 감사함은 지금도 잊어지질 않네요.”

사리호(47X90X57, 경주석)
사리호(47X90X57, 경주석)

미완에서 완연함을 찾다

최 작가는 서른 즈음 무렵, 불상의 신비로움에 심취했다. 그는 ‘32상 80종호를 담은 불상은 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적이어야 하기에, 근엄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상호(불상의 얼굴)가 가장 중요한데, 이로 인해 불상의 모든 인격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십 년을 불상을 다듬어온 그조차도 상호 작업은 쉽지 않은 작업 중 하나이다.

“어느 날 스님들이 말하더이다. 불상의 상호에는 삼라만상의 깊은 뜻이 모두 담겨져 있어야 한다면서요. 당시 저는 젊은 나이였기에 도무지 그 뜻을 모두 헤아리지 못해, 수 날을 꼬박 밤을 새워가며, 불상에 대해 공부해 나갔지요.”

석상에는 우리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때론 우리 전통이 스며있어야 한다고 최 작가는 말한다. 그가 수십 년 불상을 연구하며 깨달은 점은, ‘석상은 오늘의 나이자, 과거의 나를 닮은 그릇이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를 바라볼 후학들의 참된 선(善)이자, 오래전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내려온 정수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석상이 무엇인가? 전통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으로 중국과 일본 등 해외를 오가기 를 수여차례, 대학교수와 여러 예술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며 깨달은 바로는,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가까이에 있고, 전통이란 것은 수십 년 동안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작업하고 있는 나 자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내린 결론이라며, 형체만 깃든 한 석상을 내어놓았다. 이목구비가 선명치 않은 반추상적인 작품을 두고, 그는 ‘무엇이 보이느냐’며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 취재진은 한동안 말없이 그저 그 석상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의 질문에 대한 어떤 답도 내놓지 못했다.

“사실 이 미숙한 제 작품이 제가 추구하는 완연함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본 ‘부처’는 나 자신이 슬플 때는 세상에 그렇게 야속한 존재도 없다 느껴져 서럽다가도, 좋을 때는 한 없이 존경하며 기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보니 사실주의에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이 미완이 때론 완연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니 내 나이 환갑을 넘겨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돌질을 갓 시작한 우리 아들에게서 배울 게 많은 것 아니겠소”

하늘벼루(90X65X30, 영천석)
하늘벼루(90X65X30, 영천석)

전통을 깎다, 후학을 닦다

최 작가는 최근 석상 외에도 우리 전통 도구인 벼루와 향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글 한 획을 써내려가기 위해, 수십 번 먹을 벼루에 갈며 먹에 농담을 조절한 선조들의 수고로움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전통이라고 말했다. 또한 향로 위, 자그마한 촛대 위의 불빛을 의지하며,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우리 선비의 얼도 소중히 계승해야 할 우리의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석상만큼이나 벼루와 향로를 깎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늦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의 아들을 지도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오래전 저의 스승이 저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저도 요즘은 묵묵히 제 아들이 조금씩 정진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를 되돌아보곤 합니다. 혹여 제가 그릇됨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어진 품성에 도리어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항상 노심초사하며 아들놈을 지켜보는 데, 모르는 체하며 신경 쓰지 않는 척 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더이다.”

현재 그는, 든든한 조력자가 된 아들의 도움을 받으며 61살이 된 올해 3월, 자신의 생애 최초 ‘개인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최 작가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벼루와 향로’를 소재로 한 자신의 개인전을 3월 7일부터 10일, 4일간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개인전 준비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근 50년을 석조공예에 바치며 얻은 첫 시작을 환갑이라는 또 다른 시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 작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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