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과 우연이 만들어낸 오묘한 아름다움

서양화가 박형진 작가의 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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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유래된 ‘찰나’라는 말이 있다. 박형진 작가의 작품에는 그를 둘러싼 찰나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산, 도심 속 화장실, 작업실 등 일상의 작은 추억들이 캔버스를 가득 메운다. 하지만 또 다른 우연을 만나면 그 세계는 무한해진다. 흩뿌려진 실타래들이 그려낸 수많은 이야기꽃은, 박 작가도 통제할 수 없는 그 무한의 것이다. 우주가 펼쳐낸 자유로운 세계, 박 작가의 예술은 기존의 예술을 답습하기보다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뇌가 담겨있다.   

우연과 자유로운 영혼이 만나 이뤄진 그의 예술혼
“만약 중 2때 이웃의 국민대 미술학과를 다니던 형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려낸 토끼 그림에 대한 잘 그렸다는 칭찬이 없었다면 오늘날 저의 미래는 달라졌을까요?”
강원도 홍천 폐교를 개조해 만든 박 작가의 작업실에는 수많은 그가 전시돼 있다. 한편에는 아직 빛을 받지 못한 미완의 작품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사람들이 인적 드문 이곳에서 이따금 과거와 마주할 날이면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그. 그의 작품세계는 과거 위의 우연이 만들어낸 현재가 있다. 그리고 사색에 잠긴 지금이 있다.

“대학생 시절, 처음 붓을 잡게 된 그때처럼 칸디스키가 저를 우연히 찾아왔어요. <점, 선, 면>에서 ‘모든 물체는 각이 없다’는 구절은 지금도 각인된 현재의 기억이에요”
칸디스키는 후기 추상미술의 대가로 점과 선과 면 등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형상을 표현해낸 세계적인 화가다. 당시 칸디스키는 직관적이 추상미술로 구상예술에 익숙한 미국과 유럽에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박 작가 역시 칸디스키의 저서를 읽은 후,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새로운 예술세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새로움에 걸맞은 독특한 그만의 표현방식이 필요함을 직감했다.      

보관된 나의 청춘 기억들
보관된 나의 청춘 기억들

   

우연은 또다시 박 작가를 찾아왔다. 한국의 무속신앙 ‘진오귀굿’을 하는 모습을 대학시절 우연히 들린 한 시골에서 보게 됐다. 진오귀굿은 망자의 한을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벌이는 굿으로, 무당은 망자와 남은 가족들을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정신없이 흔들어대는 무령의 주술적인 소리에 맞춰, 남은 가족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신·우주·하늘 미지의 세계인 천(天), 현실의 세계인 지(地), 그리고 두 세계를 잇는 매개체인 인(人), 칸디스키의 말처럼 모든 세계가 연결돼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실의 차용은 우연히 아닌 필연이다. 사람들 간 인연을 점지해둘 때 쓰인다는 붉은 실 전설은 우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자유로운 그의 영혼처럼 오색실이  한 아름 작품 위에 뿌려지면, 꼬여진 실타래만큼 더 많은 인간사를 내포한다. 박 작가는 이러한 우연을 우주의 메시지라 칭했고, 그 자신 스스로를 우주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자라고 말했다.  

박 작가의 작품은 2015년 스페인 마드리드와 미국 뉴욕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트페어 출품되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한, 그의 작품 이야기는 특히 동양적 세계관에 관심 깊은 미국과 유럽에서 관심이 크다. 더욱이 복제가 불가능한 그의 작품은 소장 가치면에서 단연 돋보인다.

신은 나방으로 될 수 있다
신은 나방으로 될 수 있다

자연에서 나오다. 세계를 도약하다.
박 작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좋은 작품 활동을 위해 홍천을 찾은 지 어언 10년 세월 동안, 서울 도심에서 할 수 없었던 기묘한 실험과 반복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도약시켰다.

“작품이 떠오르지 않은 날, 사람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산을 오르곤 합니다. 들판에 핀 수많은 꽃들과 밤하늘에 수놓은 별빛을 마주하다보면 차즘 그 실마리가 풀려옵니다. 도심에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생각이 이곳에서 무한히 펼쳐져 나오곤 합니다.”  
박 작가는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자신의 작품과 대화하는 데 할애했다. 자신의 추억 위에 우연히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을 그리워하듯, 미완의 작품에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 그의 또 다른 작품 활동이다. 마구잡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에서 새, 사물, 고래, 사람, 산신령 등을 읽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그는 우주로 받은 영감이라 말했다. 실뿐만 아니라 아크릴물감, 실, 캔버스, 비즈, 한지, 망사스타킹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또 다른 자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밤이 깊어지고 깊은 사색에 잠길 때면 더 잘 보인다는 그의 작품세계는 전등 아래서 찬란한 그의 순수함이 더 잘 느껴진다. 주변 자연이 스르륵 밤에 잠들 무렵 창가로 비춰둔 달빛을 연상케 하는 <보관된 나의 청춘 기억들>과, 불빛을 그리워하는 나방을 떠올리게 하는 <신은 나방으로 될 수 있다>는 밤늦도록 지속된 그의 아름다운 고뇌가 잘 느껴지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현재 박형진 작가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올해 하반기 뉴욕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아트페어에 그의 작품을 출품할 계획을 세웠다. 박형진 작가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또 한 번 전 세계인들에게 주목받을 그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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