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로 승화된 시(詩)

40년 동안 습작해 온 시는 삶의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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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문학계를 빛내고 있는 시인들의 모임인 부산시인협회에서 활동하는 교사이자 시인이 있다. 그는 박치환 시인이자 박치환 선생님이다. 현재 부산 브니엘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시작(詩作)으로 승화시키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 초 교내 문예부 가입으로 시작된 시 창작활동은 부산대학교 사범대 재학 시절에도 발현되며 등(燈)시문학 동인회를 결성했다. 졸업 후에 가락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하던 중 1980년대 중반 무크지 ‘지평’ 5집으로 등단하였고 시 전문지 ‘시와 사상’에서 편집동인을 맡아 시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했다.

박치환 시인에게 듣는 시(詩)의 의미

박치환 시인은 1956년 생으로, 그의 세대 사람들이 대부분 경험했던 대한민국의 발전에서 과도기를 관통하며 어려운 시기를 지냈다. 이러한 삶의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치열한 과정 중 하나가 시였다. 
“시는 힘든 삶을 극복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주변인들의 어떤 도움보다도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스스로의 어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당시 저에게 기쁨이자 삶의 의미였습니다. 시 속에는 절박한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시인은 부산에서 살아왔던 지난 나날을 시에 담아냈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교사인 부친이 전출 오면서 영도에 정착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직면한 경제적인 곤궁함에 장남으로 집안의 주춧돌 역할을 해나가면서 부딪혀야 했던 온갖 어려움을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극복해 나갔다. 
“시로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들을 고스란히 써 내려갔습니다. 마흔 둘, 이른 나이에 고생만 하시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내 모든 그리움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수고로운 자식 사랑에 대한 마음의 부채를 갚을 기회가 없었던 터라 어머니는 많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저의 시로 표현했습니다.”

박치환 시인은 부산대학교 재학 시절에 부산대문학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시작(詩作)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부산대학교에서 뜻있는 친구들과 등(燈)시문학동인회를 결성했고, 그 활동 결과로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현재는 교직에 있다 보니 학생들의 수업에 집중해서 대외적인 활동은 많이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그 당시 함께 활동한 동인들 중 이미 고인이 된 신용길, 고현철 시인을 비롯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권숙, 조향미 김점미 시인 등 여러 시인들을 배출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1979년 박치환 시인은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여 전주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5.18 광주 민중 항쟁의 거대한 물결을 곁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문학적인 활동은 전무했으나 거대한 시대적 격랑은 그의 삶에  큰 아픔으로 잠재되어 있었고, 제대 이후에 내재되어있던 시적 영감들이 이후 작품 활동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만약에 이런 고통스런 상황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시를 빨리 그만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경험하고 그 부분을 시로 만드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천과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시(詩)에 대한 마음가짐

박치환 시인은 시 주제를 일반적으로 주변의 사물이나 가족 관계부터 시작해서 넓게는 사회현상까지 아우르며 쓰고 있다. 다양한 경험에서 나오는 소재를 다루는 점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이 느껴진다. 오랜 작품 활동 속에서 그는 일생 동안 한 권의 시집만을 내길 원한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작품을 발표를 해왔지만 시집은 시기를 엄선해서 한권만 출간하고 싶습니다. 시집 한 권속에 넣고자 마음가짐을 달리하니 양적인 면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시들을 꼼꼼히 가다듬어서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내보이려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진학에 초점을 맞춰온 터라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 시작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교사로서 마지막 2년 정도 남은 오늘, 그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바탕으로 인생을 되돌아보며 시집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뜨개질

 

 

외풍은 방 안을 돌며
닿는 것마다 칼질하고
고열로 앓고 있는 녀석의 머리맡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아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수없이 해대는 기침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야윈 어깨 아래로 드리워진
희미한 그림자
누구일까.
아내의 고른 손놀림 따라 자꾸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면
어머니

어머니는
밤마다 눈물로 세월의 옷을 짓고 있었다.
기워도 기워도 이어지지 않는 어둠을 떨쳐버리지 못해
지켜온 밤들.
매일 늦는 아버지는
언제나 많은 바람을 몰고 다녔다.
아버지의 옷깃에서 떨어지는
차갑고 낯선 바람의 파편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시대가 지나갔는지
창밖엔 무서운 바람의 발자국 소리들
아버지의 급한 귀가의 발자국 소리와 어지러이 
어우러졌다.
하얀 문풍지가 떨리고
그날 밤 문풍지보다 하얀 근심의 얼굴로 
병약한 우리를 지켜보며
어머니는 바람막이가 되고 있었다.
뒤엉킨 세상 한 모퉁이에서
한평생 시린 손으로 한 올 한 올 인연의 털실을 풀다
내쉰 한숨과
잠든 우리들 얼굴 위로 하염없이 떨구던 눈물방울
방울로 살갗 곳곳에 새겨진 어둠의 문신들.

오늘밤 문신들이 열병처럼 되살아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녀석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세상을 등지며 어머니가 남긴 긴 그림자 같은 털실로
아내는
어머니의 마저 못 이은 어둠을 뜨개질하고 있다. 

문학인 그리고 교육자, 
팔방미인(八方美人)

“학창 시절 생명파 유치환 시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동명이인인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계기로 접한 수많은 문학 서적들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과생이었던 저에게 문학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목마름을 느끼게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완강하게 반대를 하셨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놓칠 수가 없었죠.(웃음)”
박치환 시인은 시작(詩作)과 함께 교사의 길을 함께 택했다. 명문 경남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그가 성실히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박치환 시인은 문예 활동을 통해 꿈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고교시절 줄곧 개인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탠 터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고 국어 선생님이 된다면 문학 활동과 교사로서 소양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인문계열로 진학하며 국어 선생님이 되려고 입학했지만 당시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제 2외국어로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2학년 때 독일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어려운 전공 공부를 묵묵히 해나가면서도 시작(詩作)을 놓칠 순 없었다. 독일어과의 교수이면서 40여권의 시집을 발간한 한양대 김광규 교수와,  <한국문학의 세계화> 평론집의 주인공 김천혜 교수는 박치환 시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창작의 자극제이자 격려가 되었다. 
“교수님께서 ‘시가 참 많이 좋아졌다’,‘충분한 가능성이 보인다’라는 작은 격려들로 직접적인 습작지도 못지않게 문학인으로서 완성의 과정을 묵묵히 응원해 주셨죠. 덕분에 학창 시절의 문학 활동을 지속하는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후 교사의 진심어린 충고가 사소한 말 몇 마디라도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교직 생활의 금과옥조로 삼게 되었습니다.”
박치환 시인은 브니엘고등학교에서 26년 동안 독일어를 가르쳤다. 초임 때만 하더라도 제 2외국어는 불어나 독어가 대세였지만 세계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다양한 언어에 대한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또한 학생들에게 외국어 과목 선택권을 주면서 일본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아져 담당 과목 선생님들도 그에 따른 교육을 받아야했다. 박치환 시인도 부전공으로 일본어 교육학을 다시 공부했다. 
그는 교직생활을 하며 늘 학생들에게 남들이 잘 가지 않으려는 길을 개척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합니다. 시인 이외수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에 동감을 했습니다. ‘영어로는 최고가 되기 힘들지만 만약 파푸안뉴기니어를 배우면 대한민국에서 일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남이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전문가가 되면 어떤 곳이든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박치환 시인은 지금 당장은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향후 10년을 내다보면 미래가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기적인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충고한다.

 

박치환 시인이 그려나갈 문학의 내일

박치환 시인은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독서 교육의 현실을 그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본다.  
“오늘날에 단편적으로는 시나 짧은 글귀가 젊은이들에게 새롭게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 소비재로써 문학의 저변은 여전히 미약합니다. 다양한 삶의 문학적인 부분마저 입시를 위한 도구로 간주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독서활동은 거의 형식에 불과해 안타깝습니다.” 
학생들이 여러 매체나 SNS로 정보를 많이 얻고 접하지만, 자발적인 독서나 다양한 고전 작품을 통해서 지식과 영감을 얻는 문학 활동은 피하고 판타지 소설이나 흥미위주의 작품에 대한 관심만 있다. 박치환 시인은 앞으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적, 문학적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적인 비전을 학생들에게 다양하게 제공함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독서하고 생각하며 입시 틀에서 벗어나, 진정성이 있는 진로선택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길 바랐다. 퇴직을 앞두고 남은 기간이라도 자신의 오랜 문학활동의 경험들을 토대로 보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독서 역량과  창작 능력 고양에 힘쓰고 싶다는 그에게서 시인과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육자의 모습은 선명하기만 했다.

박치환 시인은 교사의 길을 마치고 시에 천착해 마음껏 창작활동을 이어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여전히 교사이면서 시인으로서 나아가 기성세대로 지나온 삶에 대해 끊임없는 반성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로써 진정한 자기반성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시적 모티브의 발현을 믿는다.

■ 現 부산시인협회회원
           부산작가회의회원
           브니엘 여자고등학교 교사
■ 1956 합천 출생
■ 1976 경남고등학교 졸업
          부산대학교 燈 시문학동인회 결성
■ 1981 부산대학교 사범대 독일어과 졸업
■ 1885 무크지 지평 5집 등단
■ 2005 시 전문지 시와 사상 편집동인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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