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정체성을 현대미술의 위대한 예술혼으로 실현

현역화가 1호 철학박사 일랑 이종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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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일까? 주머니와 지갑 속에서 볼 수 있는 지폐 속의 영정(影幀) 작품일 것이다. 5천 원권의 율곡 이이와 5만 원권의 신사임당 모자의 영정이 이종상 화백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주어지는 화폐영정을 두 번씩이나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생존 작가이면서 그 영정의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또한 프랑스 문부성 초청으로 박물관 르부르 까르젤 개인전이 해를 넘기며 앙코르 연장전시 요청을 받은 세계 유일의 작가이자 ‘고구려문화지키기’와 ‘독도문화심기 운동’ 본부장으로 투철한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으로 우리문화의 자생성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국민화가다. 그의 작품과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매진된 한국조폐공사 발행의 영정작가 사인첩
매진된 한국조폐공사 발행의 영정작가 사인첩

일랑 예술혼의 계기가 된 가정사

대학 재학 중의 역사와 미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
일랑 이종상 화백의 어머니는 “종상아! 너는 종일 그림공부만 하고 있으니 지루하지도 않니?” 학교에 입학하기 전 방바닥에 배 깔고 만화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온종일 엎드려 그림만 그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그림을 ‘공부’라고 말씀하셨다. 
일랑 화백은 원예학을 전공해서 텅스텐 광산을 하는 대지주 할아버지와 바이오과학자로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광복 직후 명동 중심지에 있던 전구회사를 인수 받아 삼천리표 전구를 생산하는 큰 사업가로 활동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50년 9월 서울 삼광초등학교 졸업을 2개월 앞두고 6·25 전쟁이 발발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한 피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어머니는 졸지에 행상을 했고 후일 대그룹의 CEO 사장으로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두 살 위의 형님은 경복중학교를 중퇴하고 피난 가서 나무장사로 끼니를 이으며 어렵게 살았다. 화가 지망생이셨던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아서인지 대전고등학교 박관수 교장의 영향으로 미술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어 서울공대 건축과를 가려고 이과반에서 공부하다가 끝내,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회화(繪畵)는 그림의 포괄적인 의미이죠. 동양화, 서양화라는 말은 근자에 생긴 단어인데 미술사에서는 동, 서양화를 구별하지만 창작인으로서 적절치 못한 구분입니다. 그래서 동양화가, 서양화가라는 말을 나는 제일 듣기 싫어한답니다.”라며 진정한 대한민국의 화가라면 동서고금을 아우르고 끝내 우리만의 자생성을 창작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의 대비도 민족문화의 동질성 회복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는데 자꾸만 이념논쟁으로 대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고학생으로 노동자합숙소와 서울역 대합실을 숙소로 삼으며 양말을 팔아 학비를 마련해야했다. 4.19혁명 당시에는 선봉장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앞장서기도해서 지금은 건국포장의 국가 유공자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도 대학 재학 때, 국전에서 연이은 특선 3회 수상과 신인 예술상 최고특상을 거머쥐며 대학 졸업과 함께 국전 최연소 추천 작가로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대장간 같은 노동 현장을 그리면서 불평등 사회 속에서 민중미술의 효시라 할 만큼 노동자들의 삶과 애환을 같이 했다. 그래서 그의 호 일랑처럼 역사의 파도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품을 표현해냈다.

내외 소통의 스크린 역할을 하는 창호문화에 얽힌 이야기
우리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이칼문화이고 우랄알타이계로부터 내려오게 된다.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고 싶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체질적 자생성이라고 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지 않으면 속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공을 바쳤으니까 너희 나라는 우리 속국이었다라는 주장은 억지”라고 한다. 외교적으로 조공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예컨대 이웃집에 떡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이웃집에 종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즉 문화가 같아야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를 장판으로 방바닥에 깔고 사는 구들문화는 전 세계 우리민족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크린문화를 일찍이 향유한 창호문화의 종주국입니다. 창호지에는 기막힌 과학이 있어요. 창호는 일 년에 한 번씩 뜯어내서 바꾸는 것이죠. 뜯어내고 보면 원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알 수 있는데 바깥쪽은 아래가 더러워지고, 안쪽은 위쪽이 더러워지는 거죠. 알게 모르게 찬바람이 아래쪽으로 들어오고 위쪽으로는 방안의 더운 공기가 배출되니까요. 이것이 요즘의 공기청정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일종의 자동차 에어 크리너와 같은 역할을 해서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의 공기도 맑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호는 스크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등잔은 창호문과와 깊은 관계가 있다. 등잔은 높이와 밝기 조절을 하고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밖에서 안에 있는 사물의 형체를 그림자로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들어오실 무렵에 할머니는 밥상을 문 쪽으로, 등잔을 아랫목에 두어 조명, 밥상, 스크린 순서로 배열을 하여 초점을 스크린에 맞추면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고 한다. 따라서 조명은 항상 물체의 뒤에서 비춰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의 텔레비전의 원리가 그렇고 그보다 훨씬 먼저 우리의 정통 영정기법에 북채법(北彩法)이 그것임을 알아야한다”고 했다.  

보성 벌교 태백산맥문학관 야외 옹석벽화 (원형상-통일염원) 8 x 81m 일랑작품 부분
보성 벌교 태백산맥문학관 야외 옹석벽화 (원형상-통일염원) 8 x 81m 일랑작품 부분
1999.09.09 - 평양덕흥리벽화
1999.09.09 - 평양덕흥리벽화

독도와 고구려 벽화에 관심을 가지며
사대주의가 아닌 역사의식과 민족정체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중요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 의상 등 모든 패턴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현대 미술도 벽화에서 시작됐고, 벽화를 가진 민족은 원시시대부터 족보 있는 문화 DNA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중·고등학교 때 고호나 세잔느를 알게 하기 보다는 수렵도 쌍영총, 무용도 등 고구려 벽화를 우선 가르쳐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랑은 한국회화의 자생성과 우리 문화의 근원을 찾아 나서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고구려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구려 벽화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중국으로 들어가 고구려 고분 대부분을 조사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세계의 동굴벽화를 모두 연구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는 습한 동굴에서도 수 천 년을 버텨낼 수 있는 독자적인 기법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 세계 첫 번째 독도 화가이면서 최초의 독도 NGO문화운동가가 됐다.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체험관을 가보면 숱한 독도 역사자료들 속에 유일하게 한 벽면 전체에 이화백이 7~80년대에 현장에서 그림 독도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진경산수화를 그린 정선이 독도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1977년 동산방 초대로 ‘독도 진경전’을 열었다. 누구보다도 독도의 상징성을 먼저 깨닫고 예술작품으로 그려냈으며 그에 멈추지 않고 한국 최초의 ‘독도문화심기운동’ 본부장으로 40년간 NGO 활동을 이어갔다.

 

97.11.28-루브르까르젤 설치벽화(원형상-마리산) 6x72m 앞에서 
97.11.28-루브르까르젤 설치벽화(원형상-마리산) 6x72m 앞에서 

루브르 전시, 세 번의 앙코르를 받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외규장각 조선의궤와 직지심경 반환을 주장하기도

일랑은 1997년 프랑스 문부성 초청을 받아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샤를르 5세홀에서 생존 작가 최초로 초대 개인전을 열어 대한민국 예술의 자존심을 세우고 아름다움을 펼쳐보였다. 설치벽화(6m×72m) ‘원형상-마리산’이란 작품으로 병인양요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했는데, 표현방식은 우리나라 자생 문화인 한지설치벽화를 선택해 한국 창호문화의 배면 조명법을 세계 최초로 시도해 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3차례의 앙코르 요청을 받고 전 세계 127만 명의 관객들이 관람하는 성과를 올렸다. 루브르 박물관 측은 설치벽화의 영구비치를 요구했지만 이 화백은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이행하면 응하겠다고 답했다, 프랑스가 난색을 표하자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고 철수하겠다.”고 말하며 또다시 한국문화의 자존심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주어지는 화페 영정을 두 번이나 그려
그는 1977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5천 원권의 율곡 영정을 그리고 난 후 30여 년 후에 또다시 한국 최고액권 화폐인 5만 원권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리게 된다. 본시 화폐영정은 화력과 인품과 자질이 당대 최고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급의 원로 화가에게 주어지는 존엄 자체이다. 또한 화가에게 사상은 물론 경제와 관련한 모든 부분에서 일체 청렴함을 엄격히 심사한다. 그래서 전 국민이 사용하는 화폐의 영정 작가는 화폐 속의 존경 받는 주인공 인물에 누가 되지 않도록 가능한 ‘살아온 날이 길고 살날이 짧은 원로’ 중에서 조선 5백년의 정통 영정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화가여야 한다.그동안 화폐는 순종 어진을 그린 마지막 화워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의 제자들인 운보(雲甫) 김기창이 만 원권, 현초(玄草) 이유태가 천 원권, 월전(月田) 장우성 선생이 백 원 주화를 각각 그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들이다. 오천 원권도 원래는 이당 선생이 그려야 했지만 병환으로 그릴 수 없게 되자 고심 끝에 원로 제자가 아닌 젊은 제자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을 화폐위원회에 추천하여 심사에 통과되었다.

“혀 속에 들어있는 한국인의 색채의식” 이라는 논문 발표로 주목을 받기도
“화가는 재료를 다룹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그림을 오래 보관 할 수 있죠. 그래서 나는 미대에서도 물리학, 화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화가는 단지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강변한다. 또한 한글디자인을 하려면 어문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가 발표한 논문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비과학적인 것이 한문입니다.”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새삼 강조했다. 그는 영어, 일어, 불어 어디에도 없는 한글에만 있는 색의 3원색이 우리의 혀 속에서 과학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랑, 빨강, 파랑, 까망. 하양이라는 유, 무채색의 오방, 오정색 외에는 순수 한글 색 이름으로서 어미변화를 하지 않는다. 즉 이 5단어만이 명사일 때는 ~ㅇ 밭임이 붙어 노랑, 빨강, 파랑, 까망, 하양이 되고 형용사로 쓸 때는 ~ㄴ을 붙여 노란, 빨간, 파란, 까만, 하얀이 되고, 부사가 되려면 ㅎ+게로 변하여 노랗게, 빨갛게, 파랗게, 까맣게, 하얗게가 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무게나 중량을 가지고 있으며 습기, 공간, 시간, 온도, 깊이도 표현하는 색조어가 탄생한다고 한다. 

채색은 감산혼합, 색광은 가산혼합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산혼합의 유채색인 삼원색과 무채색의 까망, 하양을 합해서 소위 오방색이라고 한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일찍이 색채마다 시공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노색은 중앙,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하얀색, 남쪽은 빨간색, 북쪽은 까만색으로 공간을 표시한다. 또 노랑은 땅과 중앙의 제왕을 뜻하고 현재를 의미한다, 인의예지신은 동서남북중이고 매란국죽송은 춘하추동금(今)과 통한다며 미술의 색채를 알려면 동양의 철학을 공부하고 다른 학문과의 통섭과 융합을 주장한다.
 
현대미술의 거장답게 미술에 대한 이해와 역사 및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영정과 같은 극세화부터 3층 높이의 세로 8m에 가로 81m 대벽화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무한능력의 이종상 화백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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