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무엇이 아름다움을 전하는가?

  • 입력 2017.01.04 10:31
  • 수정 2017.01.04 10:34
  • 기자명 정정수 조경작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학문과 기술이 이처럼 단순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는 전문가와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과의 사이에 설명되어야 하는 많은 논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필요없는 것조차 세분화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렇지만 사람들 모두가 타고난 성향이 바로 그 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근본이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세분화되어 많은 분량의 책으로 출판되고 있지만, 그 많은 분량의 세부지식을 접하기 보다는, 근본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매우 쉽고 중요하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간단한 근본’은 아름다움에 대한 접근방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계되어지지 않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과 서정적 분위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으로 이끌어 준다( 벽초지수목원-호수)

아름다움은 자기다움이다!!

현대미술은 추상 또는 비구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형태가 없는 미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현대에도 정물화나 풍경화같이 형태가 있는 미술도 있어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많이 있다. 

여기서 풍경화를 거론하는 것은 조경, 즉 Landscape라는 단어가 풍경화를 말하는 Landscape에서 빌려 쓰는 단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풍경화를 예를 들어서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것이 조경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쉬운 방법이라 생각된다.

아름다움이란 자기다운 것이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이 말의 깊은 뜻도 산은 산답고 물은 물답게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모습으로 존재할 때 진정한 의미로서 산이라 하고 물이라 할 수 있다는 뜻에 다름없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의 외면과 내면 또한 자기다울 때 아름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외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형외과를 찾는 등 자기다움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변의 사람들 또한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습관보다는 외면이 아닌 내면으로부터 근본의 진정성을 찾을 줄 아는 내공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것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나무에서도 다를 것이 없다. 

모든 수목이 주변 환경에 따라 형태가 각각 다르게 성장하게 되어 그 모두가 제각각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인데, 현재의 사정은 많은 수목 중에서 선택되어지기 위한 나무들이 규격에 맞게 일률적으로 생산되고 일률적으로 식재되는 우를 범하는 곳도 있다. 

이것은 조경설계와 시공을 분리하는 제도적 모순 때문이다. 나무의 직경, 수고, 폭과 같은 규격을 설계상에 규정하다보니 ‘규격에 맞는 나무를 생산해야만 대량으로 판매가 가능하다’는 업자들 간의 합의가 도출된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의 암묵적 결탁(?)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도 있다. 
나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로와의 관계에 의해 자유로운 형태로 클 수 있는 기회는 박탈 당하고 규격에 맞는 반듯하게 자란 나무만을 선호하게 되는 현실은 아름다운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아름답다는 가치와 필요에 부합하는 조경용 수목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라도 자유롭게 자란 잡목(잡목이란 명칭을 가진 수목은 없겠지만, 조경용으로 규격에 맞게 키워진 나무와는 다른 나무를 뜻함)을 선택하여 조경에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운 조경공간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나무 농사를 짓는 농장에서 출하기를 맞추지 못한 못난 나무들이나 출하에 함께 하지 못한 잡목(?)들만으로도 아름다운 공간창출이 가능하다(벽초지 수목원)

분당 S어린이집 (2~3세 영아를 위한 놀이집)_ 제재소가 아닌 자연에서 얻은 휘어진 자재들의 모양 그대로를 이용해 만들었다. 지붕은 눈비를 가려야 하는 목적이 아니므로 빛을 실내로 들여와 유아들의 꿈을 키워 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조경공간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난제를 넘어서야 한다. 비록 설계에 제시되는 것 역시 나무임에는 분명하지만, 가장 잘못된 것은 아름다운 나무가 선택되지 못한다는 점을 뛰어 넘지 못하면 해결되기 어려워진다.

담양의 메타세콰이아 길과 같이 규격화 된 나무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이 나무의 자기다움은 수형이 콘(corn)의 형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자기다운 그 자체가 가로수로 쓰일 때 아름다운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로수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수종의 나무를 인위적으로 조성했을 때 아름답다고 호평을 받는 장소가 있다.
청주 IC에서 시내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총 6km에 식재된 프라타나스 가로수로 유명한 “청주가로수길”은 양방향 모두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터널의 형태가 만들어져 있어서 드라이브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만추”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그 후 담양에 가로수를 심어진 메타세콰이아는 빠르게 성장해서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국내 제일을 자랑했던 담양의 대나무공예는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주방 용품으로서 사용이 제한되면서 점차 쇠퇴해 대나무 장터는 없어지고 동남아에서 수입된 대나무 공예품이 자리잡고 있더니 관광객의 발길조차 뜸해졌다. 이 시기에 담양에서는 대나무가 아닌 메타세콰이아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담양군은 이 가로수길을 관광객에게 내어주고 자동차길을 옆으로 만들어주어 차량을 통제함으로서 사람과 나무가 편안하게 교감하도록 배려를 했다. 이 나무가 불러모은 관광객들 덕분에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나무의 힘이다.
이렇듯 나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술은 SNS를 타고 급속하게 전파됐고 많은 관광객들이 건강을 위해 또는 힐링을 위해 피톤치드의 효과를 체험하기 위해 편백나무 숲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특이한 사항은 사람들을 부르는 나무가 가로수에서 숲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주 가로수길, 담양 메타슈콰이아 길에서 축령산 편백나무숲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이동해서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이제 어느 장소의 어느 나무가 우리를 부를까요?

물론 지극히 현대적이거나 기하학적 형태의 조경일 경우 설계와 시공이 일치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건축자재로 사용되는 벽돌이나 외장용 석재와 같은 것은 규격품이어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조경용으로 사용되는 나무에 규격을 정한다는 것은 80% 이상이 넌센스이다. 아름다움은 곧,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의 개념에 충실한 조경공간을 추구한다면, 이 규격에 대한 제한이 60% 이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격과 규제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규제가 정해놓은 기준에 못미치는 것들을 기준만큼 이라도 끌어 올리려고 만들어진 것이지 기준 이상의 것까지 기준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를 집행하는 일부 못난 사람들은 그 기준 이상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채 기준에 맞추기 위해 끌어내리거나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나무들로 시공된 공간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금광 래미안 초심원 2007년 시공 사진 윤재환)

이제는 풍경화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 해보자.

물론 모든 풍경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는 화가의 수준도 다르고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취향은 더욱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중에는 모두가 애정을 갖고 칭찬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고품격 풍경화는 반드시 있다. 

서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공유는 3초 이내에 결정된다고 하듯이 좋은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풍경화 속에 그려져 있는 모든 소재들, 즉 산, 물, 나무, 꽃, 사람, 그 외의 사물들에 대한 표현을 할 때 아름다운 것을 골라서 그림 속에 배치하는 감성과 감각적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풍경화를 그리고 그 풍경화가 보는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러한 수준의 화가들은 아름다운 것은 그 사물자체가 자기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표현할 소재를 찾기 때문이다. 풍경을 찍는 사진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좋은 화가인지 아니면 화가 흉내를 내며 그림만 그리는 사람인지 구분이 된다. 이는 후일 명성을 드높이는 화가로 남느냐에 대한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조경가도 화가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규정만 지켜야 하는, 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서 별로 감흥을 주지 않는, 건축의 들러리나 하는, 남의 것을 흉내 낸 따위의 조경공간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혹시 자신이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능하다면 후일 명성을 남기는 조경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조경인 모두가 함께 노력을 경주하여 우리나라가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지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위로 받고 싶어 한다. 크고 작은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훼손해 놓은 자연을, 작게나마 자연에 되돌려 주려는 의지가 조경인들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태풍이 지나간 후에도 하늘의 복구부터 이루어지게 한다. 그 푸르름으로...
땅의 복구 또한 빠르게 이루어진다. 그 분주함으로...
식물들 또한 피고 지고 또 다시 피어난다.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