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희노애락을 뛰어넘어

명사초대석 조철영 전 금성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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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환갑이나 칠순잔치할 나이가 부끄럽다고 한다. 그 정도로 평균수명이 높아져 건강하게 장수하고 있고 활동까지 이어진다. 70대 중반 정도라면 어떤 것에도 크게 놀라지 않을 정도의 세월의 무게감이 있다. 6.25를 생생하게 겪었고 어렵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조용히 뉴스를 통해 역사의 한 장면이 될 2016년 지난 촛불시위를 지켜봤다. 평생 가정을 위한 봉사가 오롯이 국가를 위한 충정(忠情)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뛰어온 인생, 지나온 세월의 흔적은 사람마다 모양도 깊이도 다르다.

그 시절, 젊은 청춘의 인생굴곡

조철영 교장은 문학과 예술의 고장 통영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는 많았지만, 농사와 사업을 같이 했던 집안이라 유복했고 어렵지 않게 교육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교육을 중시했던 집안 분위기에 따라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때부터 조철영 교장도 형을 따라 진주로 향했다.
조철영 교장은 동네에서 똘똘하기로 유명해 동네 어르신들이 ‘뭐가 되어도 될 놈’이라고 말하곤 했다. 진주 수정남동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우등생이었고 반장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4학년 시절 6.25가 발발했을 때에도 담임을 도와 학급 문제를 읽고 수정하기를 자주 도왔다. 조철영 교장은 체육에도 재능이 탁월했다. 그래서 진주 봉래초등학교에서는 기계체조 대표선수를 했다.
이후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경남의 명문 진주중학교로 진학했다. 체육교사 추천으로  투구실력이 좋았던 조철영 교장은 야구부에 들어가 1루수를 맡았다. 2학년 때 생각지도 못한 큰 고난이 들어닥쳤다.
아버지가 들었던 계의 계주가 잠적하면서 가세는 기울었다. 맏형은 진주사범을 나와 부산에서 좌성국민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지만 바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정도의 여력은 아니었다. 결국 모든 가족이 진주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영도 봉래동으로 이사온 가족은 하루하루 자리를 잡아 나갔다. 금성중학교에 강사로 나갔던 형 덕분에 금성중학교에 전학했다.
한 학년에 반은 딱 한 반으로 60여명. 학급의 2~3명은 서울대로 갔고, 나머지는 인서울이나 인천 그리고 부산대로 진학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학급에서 3~4등을 오갔던 조철영 교장은 연고대 원서를 내기를 희망했으나 일가친척 없는 상경결정은 쉽지 않았다.
마지막 부산법대와 수산대학교 두 개의 원서에서 정해야 했다. 우연히 시험일이 겹치자 과감하게 등록금 면제가 가능한 수산대학교로 결정했다.
20기, M197학번으로 입학한 조 교장은 이미 결정된 내용이나 통영인의 프라이드를 갖고 ‘멋진 선장’이나 되고자는 꿈으로 수산경제학(현 수산경영학과)으로 진학했다. 당시 수산대학교는 특색 강한 국립대학교였다. 전국 13개 시도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였다.

 

군에서 사고로 생긴 후유증

졸업 하고, 뒤늦게 창원훈련소 1기로 입대해 동래병기학교 교육을 받았다. 군에서는 친구였던 ROTC장교들이 반가워했으나 타 대학 장교들이 거리감을 두게 했고, 조 교장은 당시 어린 나이에는 그런 불평등한 장교와 사병간의 거리가 못마땅하게 보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군부대 내 대학졸업자가 3%도 안 되었던 시절, 병기기지보급창 보급과에 배치된 조 교장이 했던 일은 병기물자가 들어오면 영문표기대로 적는 일이었다. 

하루는 작업 인력이 부족하다고 상사가 불러 병기고 지붕 페인트작업을 해야 했다. 작업 중 갑자기 슬레트 지붕이 꺼지면서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밑에는 철제로 된 무기류가 있었지만 다행히 떨어지면서 군복이 한 번 철못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한 쪽 뇌를 감싼 뼈가 함몰될 정도로 큰 수술을 치뤄야 했다. 제3육군병원에서의 2차에 거친 대수술.
이로인해 국가유공자 신세가 되었고 예전처럼 탄탄한 체력에 세상에 대한 자신감도 사라졌다.
제대 후 동주여자중상업고등학교에 비즈니스 잉글리쉬 강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1년정도 하다 나올 생각이었고, 취업에 능숙한 선생이 인기 높다길래 큰 기업체를 다니면서 열심히 학교를 홍보하고 학생들 취직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1년이 어느새 4년이 되었고, 모교 금성재단에서 조 교장의 소식을 듣고는 바로 스카웃 제의가 왔다. 그렇게 시작한 금성중학교 생활을 35년간 무사히 마치고(2004.8 정년퇴임) 신라대학교 평생교육원 수료 후 신라대 일어일문학과에 편입해 졸업하고(2012.12.12) 현재는 일본문학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프로필>
1942년 통영 생, 진주
금성중, 금성고등학교
국립부산수산대학교 수산경제학과
전 금성중학교 교장 (2004년 퇴임)
신라대학교 일어일문학과 卒

<수상경력>
2004.8 대한민국 홍조 근정훈장 외 10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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