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인 경기불황이 만든 ‘현대판 자린고비들’

  • 입력 2013.05.02 15:19
  • 기자명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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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점>

장기적인 경기불황이 만든 ‘현대판 자린고비들’
‘간장족’이 몰려온다

이른 바 ‘커피애호가’인 직장인 유 모 씨(34)는 매일 점심 후 마시던 전문브랜드 커피를 끊었다. 한 잔에 최소 2,000원 하는 커피값이 부담스러웠기 때문. 아예 마시지 않거나 가끔 생각이 나면 탕비실의 ‘봉지커피’나 일명 다방커피로 불리는 ‘자판기커피’를 마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비단 커피뿐만 아니다.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자주 들르던 고가의 ‘참치전문점’은 회사 근처의 값싸고 부담 없는 ‘치킨 집’으로 바꾸는 등 생활 전반의 지출을 대폭 줄였다. 직장도 탄탄하고 모아 놓은 돈도 좀 있는 유 씨지만 최근 경기불황을 경각심 삼아 ‘짠돌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장기불황시대, 소비산업의 지형을 바꾸는 주체로
30대 초반의 공무원 이상혁 씨(가명, 33)는 주위에서 오래 전부터 유명한 ‘짠돌이’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평소 ‘아울렛’에서 구입한 2만 원 짜리 재고양복을 입고 다니고 10켤레에 3,000원 하는 재래시장표 양말을 즐겨 신는다.
집이 지방이어서 사당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그는 광화문의 사무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고 대부분의 생필품을 소셜커머스를 이용해 할인을 받아 구입해 쓴다. 과일이나 채소 등은 100g 단위가격까지 줄줄 꿰고 있는 임 씨는 어떤 품목을 언제 어디서 구입해야 할인을 받고 또 저렴한지 미리 관련정보를 챙기고 장을 볼 때는 미리 필요한 품목을 적어가기 때문에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사실 이 씨 같은 전통적인 ‘짠돌이’는, 그 수효는 적었지만 어느 시대든 늘 존재해 왔다. 하지만 위의 유 모 씨의 경우처럼 중산층 출신의 ‘짠돌이’는 최근 새로이 등장한 ‘뉴 라이프스타일’이다. 체감경기가 호전되지 않으면서 서민들은 물론 중산층의 소비패턴이 ‘알뜰’하게 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더 실속 있게 소비하는 문화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그래서 최근 생겨난 신조어가 바로 짜게 생활한다고 해서 붙여진 ‘간장족’이다. ‘간장남’과 ‘간장녀’, 즉 ‘간장족’은 20~40대의 젊은 층들 가운데 각종 할인 또는 무료 제공 혜택을 활용하는 등 의식적으로 알뜰 소비를 하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특히, 이들의 경우 40대 이상의 고령층과는 달리, 2012년 현재 일반화돼 있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커피값이나 통신비, 문화비 등을 아끼고 적립된 포인트를 적절히 관리, 사용해 ‘모바일 간장족’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디지털 ‘자린고비’를 위한 실속만점의 ‘헬퍼앱’도 등장했다. 대형 백화점이나 문화센터에서는 불황기 재테크 강좌로 ‘간장족’들을 양성하기도 한다.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의 ‘현명한 자린고비 짠돌이 짠순이 되기’ 강좌가 바로 그 것.
‘간장족’들의 경우 무조건 돈을 쓰지 않고 아끼기만 하는, 그야말로 ‘자린고비’는 아니다. 그들이 돈을 아끼는 이유는, ‘더 잘 쓰기 위해서’이다. 돈이든, 물건이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다. 

‘간장족’ 겨냥한 기업들도 발 빠른 대응
이러한 ‘간장족’들이 출현하게 된 주요 원인은 물론 장기적인 경기침체 탓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은 300만여 원으로, 경제상황이 가장 악화됐던 지난 2010년 대비 1.3% 포인트 줄었다.
사실상의 실업자는 이미 400만 명을 넘어섰고 청년 실업률은 파악하기 조차 민망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여기에 한국은행이 지난 6월 14일 발표한 ‘올 1분기 자금순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금융부채는 1,106조 9,000억 원으로 잠정 집계돼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전반적인 경기상황이 이렇다보니 소수의 부자들만 빼고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현실이 당연한 듯 보인다. 앞으로 경기회복의 전망이 그리 높지 않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임을 감안할 때 ‘간장족’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불황으로 인한 ‘간장족’들의 확산에 각종 서비스 업계들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우선 ‘간장족’들이 선호하는 저가의 상품들을 기획해 내놓고 있으며 각종 이벤트와 할인, 마일리지 적립 등의 ‘당근’으로 ‘간장족’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각 기업들이 상호 제휴를 통해 이중의 할인을 제공하거나 포인트 적립을 통해 알뜰 소비자들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영화관 할인이나 레스토랑 등 주로 외식, 서비스 위주였던 제휴 대상 업종이 패션이나 브랜드 등으로 확장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게 현실. ‘간장족’들의 등장으로 소비산업 전반의 작지 않은 지형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간장족’들의 정보 공유와 ‘짠돌이 삶’의 노하우를 나누기 위한 사이버 모임도 생겨나 활발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01년 개설돼 올해로 12년째를 맞는 장수 카페인 ‘짠돌이 카페(cafe.daum.net/mmnix)’의 2012년 10월 8일 현재 회원수는 무려 77만여 명을 넘어섰다.
펀드와 적금, 주식, 보험, 증권, CMA, 연금 상담 등의 각종 재테크 정보와 전기요금, 도시가스 요금 등 생활비 줄이기 노하우, 알바와 부업 정보 등 성공을 위한 ‘짠돌이’들의 살아있는 생생 정보를 제공하는 이 카페는 회원들의 경험담과 소식을 전하는 ‘짠돌이 웹진’까지 운영하는 등 활동영역은 상상을 초월한다. 

삶의 질 높이는 합리적 소비, ‘긍정적’
포털 ‘다음’에 둥지를 튼 ‘알뜰족 카페(cafe.daum.net/youllsosul3)’ 역시 4만여 명의 ‘짠돌이’들이 가입돼 있는 매머드 동호회. ‘확률 높은 경품 이벤트’ 소개나 생활 속 재테크를 나누는 등 많은 회원들에게 인기 있는 정보공유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집단을 이룰 정도로 ‘알뜰족’이 늘어나는 현상은 이미 우리 사회의 한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 재테크 전문가는 최근 ‘간장족’의 출현에 대해 “경기침체가 만들어 낸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라며 이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검소한 소비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 건전한 소비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근 인터넷에는 ‘짠돌이 10계명’이라는 글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짠돌이 10계명’은 ‘마일리지 카드와 할인카드 혜택은 꼭 챙긴다’, ‘모든 금융거래는 인터넷으로 한다’, ‘택시는 절대 타지 않는다’ 등 짠돌이로 살아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 ‘명품은 꿈에라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거나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시장가격을 조사한다’, ‘각종 이벤트와 경품 응모는 반드시 참여한다’ 등 알뜰주부가 챙겨야 할 필수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로또 등 복권과 주식투자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와 ‘주거래 은행과 주거래 주유소 등을 만든다’, ‘자동이체로 저축하고 그 차액으로 생활한다’와 ‘충동구매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가 포함됐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열풍을 이끌고 있는 ‘간장족’ 신드롬은 경기상황이 급속하게 좋아지지 않는 한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경제위기로 인한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는 무엇이든 아끼고 검소하게 사는 것은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간장족’들이 무조건 아끼고 안 쓰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일에는 과감히 투자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들의 소비는 ‘궁상’이 아니라 ‘알뜰’에 가깝다. 다시 말해 ‘합리적 소비’인 셈이다. 경기불황과 고물가시대, ‘간장족’의 출현은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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