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진주’ 쟁탈전으로 촉발된 아랍의 비극

  • 입력 2013.05.02 13:57
  • 기자명 조성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검은 진주’ 쟁탈전으로 촉발된 아랍의 비극
1990년의 ‘걸프 전쟁’

19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냉전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20세기말 전 세계는 평화무드가 조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지구촌의 화약고 가운데 하나였던 아랍권의 이라크가 문제를 일으켜 터진 전쟁이 ‘페르샤만 전쟁’, 이른바 ‘걸프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검은 진주’로 일컬어지는 석유의 제공권을 두고 이라크가 벌인 전쟁이었지만 실은 아랍권의 군사적, 정치적 역학구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담 후세인의 정략적인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에서 이라크가 미국을 비롯한 30여개 국가의 연합군인 다국적군에게 패배함으로써 통치자 사담 후세인의 권력기반이 약화됐으며 후세인은 13년 후인 2003년 또 한 차례의 이라크 전쟁을 치르며 완전히 몰락했다.

‘석유’ 빌미의 영토 분쟁이 원인
걸프 전쟁이 발발한 배경은 1980년의 이란-이라크 전쟁에 있었다. 1961년 쿠웨이트가 영국보호령에서 독립되자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 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 전쟁은 장기화돼 휴전하는 1988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이 지속된다. 이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국경분쟁지역에 유전을 설치하게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유전 설치에 항의하게 되고 쿠웨이트 영토에 대한 침략의 발판이 된다.
1990년 8월 2일, 드디어 이라크는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당시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외적인 명분에 대해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몰래 채취하고 있고 19세기 제국주의 유럽 열강국가가 본래의 이라크 영토에서 쿠웨이트 지역을 떼어 냈다는 이유를 들었다.
3만 명의 쿠웨이트군은 어이없게 무너졌고 3시간 만에 쿠웨이트 수도인 쿠웨이트 시에 이라크군이 진입해 점령했고 곧 사담 시로 개명했다. 쿠웨이트 국왕은 인근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에 철수를 요구하며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오히려 일방적인 합병을 선언했다.
사태가 악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미국은 즉각 사우디아라비아에 6척의 항공모함과 46만의 대 병력, 1,300대의 최신 전투기를 배치했고 아랍권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이집트 등 주요국가들을 중심으로 다국적군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평화적 사태해결을 도모했지만 수포로 돌아갔고 유엔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비디오 게임’ 같은 전쟁, 다목적군의 승리
1991년 1월 16일,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은 작전명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이 개시됐다. 미국 공군의 EC-130H 전자자원기가 이라크군 통신을 방해했고 17일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공습이 시작됐다.
당시 이라크 전투기는 거의 폭격으로 출격하지 못했으며 설사 출격하더라도 대부분 다국적군의 F-16과 F-18, F-15E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5,000대가 넘는 전차는 불능이 되었으며 이라크는 간간이 이스라엘을 항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대부분 미국이 제공한 최신형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당시 40일에 가까운 포격으로 이라크 본토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2월 24일, 다국적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항공기 호위 하에 진격시켰다. 이라크군 전차는 다국적군의 미국제 M1A1 전차나 영국제 챌린저1 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부시 대통령이 전쟁 발발 42일 만에 전투를 중지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이라크의 패배로 쿠웨이트는 해방이 되었으며 기존 유전에 대한 권리도 되찾았다.
‘걸프 전쟁’은 당시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총동원된 ‘초현대전’이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당시 최고의 무기들 앞에서는 100만의 대군 병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인명피해는 전쟁의 규모에 비해 매우 경미했다. 첨단무기들의 타깃은 기존 전쟁에서처럼 인명에 있지 않고 주요군사시설과 상대무기였기 때문이다.
이라크군은 후퇴하면서 쿠웨이트 정유시설을 파괴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유 오염이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 무모한 군사 모험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미국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대표단 등을 설득해 복잡하고 서로 얽힌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이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협상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2월 28일 10시를 기해 전쟁은 종식됐다. 후세인은 UN의 12개 결의안 및 휴전조건 5개항을 수용하면서 전쟁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