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정서 신비스러운 무의식으로 풀어내는 작가

유년 시절 고향 잔상 그만의 언어로 재탄생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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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조각가 김성식

그래, 그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맨 처음 접하고 형용할 그 어떤 문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연상되기는 하나 콕 집어 “이거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 그 신비스러운 체증은 오래 가지 않아 풀리었다. 새벽. 새벽이었다. 푸르스름한 색채, 맑은 하늘인 듯 바다 같고 그러면서도 우주를 품은 깊은 밤하늘 같은 작품이었다. 진하되 흐릿하고 형체가 있으되 무형(無形)인 것 같은 묵직하되 가벼워 보이고 거칠되 부드러워 보였다. 무언가 말을 건네는 듯하되 아무 말도 없는 것 같았다. 이렇듯 갤러리들을 일순 사로잡는 조각가 김성식은 한국적인 미를 그만의 토속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와 지향점을 들어다 보았다.
조각가 김성식을 소개할 때는 으레 추상이라는 말이 덧붙는다. 자연 세계에 존재해 보이는 일정한 형태가 아닌 작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되는 형태를 통상 추상이라 일컫는다.
 “제 작업은 어떤 대상이나 그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상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돌을 대하고 있다’던 그는 그 옛날의 무영탑(無影塔)을 조각하던 백제 석공 아사달처럼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철저히 유년의 추억, 그 무의식 속으로의 유영(遊泳)을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시간의 웜홀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 고향 들판의 흙내음과 바람소리, 흘러가는 구름과 조우하고 형상화한다. 그의 무의식 깊이 내재된 천국과도 같았을 평화의 세계는 그의 작품을 통해 부활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형태를 만들었으나 무형인 듯 경계를 허물고 형태 내부의 모든 질료들이 원자화 되어 공기 중을 넘노는 듯 관람객의 폐부를 깊숙이 파고든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단일 된 사고를 허하지 않고 작품이 놓인 시야 전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 마법처럼 작용한다.

그의 작품이 처음부터 이렇듯 차원을 넘나드는 듯한 추상은 아니었다. 초반 그의 작품은 주로 선을 이용해 형상을 만들어 공예적 요소를 가미했다. 그러다 점차 서정적 추상성이 가미된 조각을 작업하게 됐다. 초반 그는 돌의 표면을 갈아 매끄럽게 하기보다 정을 이용해 무수히 쪼아댔다. 이는 시간을 거슬러 통일신라시대 불국사 경내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파견된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연상시키고도 남음이다. 그의 후예인 냥 항상 조각도구를 소지하고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작품의 표면처리를 하곤 했다.
 “돌은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한국적 감성을 나타내기 위해선 겉을 매끄럽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적당한 크기로 표면을 쪼아 차가운 느낌은 없애고 소박하고 질박한 감정을 자아내는 거죠.”
무겁고 딱딱한 돌에 그는 태곳적부터 품어 왔을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그만의 언어로 재탄생시켰다. 돌은 그의 손에서 생명을 얻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 바람소리, 구름 물결”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황등석, 괴산석, 상주선, 목화선, 여산석 등 한국산 돌만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탈리아 대리석이나 외국산 돌에 비해 거칠어 제작에 힘이 들지만 질박하고 투박함 표현에 적절하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와도 잘 들어맞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가장 자기적인 작업, 한국 속에서의 형상성 추구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몰두하고 있으며 <기억> <여명> 등의 추상적 제명에서라도 유기물의 형상을 암시하는 듯 풀어낸다. 그의 추상 작품 정수는 2012년 광주 은암미술관에서 특별 기획으로 전시된 <신화>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서 그는 20여년 중견 작가의 저력을 가감 없이 선보이며 그 간 다져온 한국적 정서의 저력을 펼쳐 보인다. 오랜 시간 그의 내면에서 무르익은 새싹, 꿈 등 유년의 기억을 추상 조각으로 풀어낸다. 어릴 적 사고와 기억, 추억 등을 표현하며 원초적 감성의 신화 즉 토템의 느낌을 표현했다. 30여년 작가의 길을 걸으며 아무 계획과 준비도 없이 그저 ‘툭 던져진 듯한’ 조형과 일상, 시간, 자연, 삶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채종기 은암미술관장은 그의 성품과 더불어 작품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집념을 예찬한다. 그가 조각을 시작했던 1980년대에는 한국에서 조각 미술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회화에 미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정 같은 조각 도구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작품에의 정열을 불태웠다. 이에도 굴하지 않고 작품 세계에 정진한 끝에 마침내 그는 조각 분야에서 중진작가로 독보적 입지를 취하게 됐다. 작품에 주로 사용되는 석재와 같은 딱딱하고 차가운 재료와는 달리 그는 차분한 어조로 형제처럼 다가와 따뜻한 성품을 보여줬다고 채 관장은 술회한다.

그의 고향 익산은 화강암 채석장이라는 지역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그를 돌에게로 이끌었다. 1980년대부터 비롯돼 30년을 훌쩍 넘은 그의 작품 세계는 몇 차례 변이를 거친다. 1999년 무렵 유기적인 형태의 단절을 의미하던 작품 세계에서 그의 영감은 어릴 적 기억과 토템에 기인해 한국의 고대 미(美)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형태와 추상성에 호소하며 한국의 토속적 정서를 새겨 초현실적인 것을 상기시키고 한국 문화 전통에 충실한 작품을 보여준다. 2003년 기존 화강석의 정 자국과 질박한 느낌이 어우러진 풋풋한 정서를 느끼게 했다면 이 시기 그는 미끄러운 질감으로 여인의 피부를 연상시킨다. 어머니로 등치되는 이 여인과도 같은 부드러움은 생명체의 잉태, 곧 구형이라는 단순하면서도 환원적인 형태에 의존해 생명의 탄생을 추상화 한다. 2011년 이후 그의 작품은 원초적 감성의 신화로 그만의 추상을 풀어내며 지나친 과정을 피한다. 정화, 희생, 금기 등의 신화적 요소를 풀어내며 한국사회 토테미즘을 환원하고 앞선 시기 생명의 탄생 즉 존재의 원초적인 것으로 회귀하며 “여인은 어머니”라는 무의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가 의지를 추측케 했다.
일상, 시간, 자연, 삶의 이야기를 그 느낌만으로 편안하게 표출하는 조형의 방법 고안은 그의 예술적 고뇌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다. 조형은 형태와 재료, 작가가 의도한 이미지가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때로는 돌을 쪼면서 혹은 세워진 뼈대에 반죽된 펄프를 붙이고 말리면서 그는 과거의 흔적, 기억, 태고의 언어, 내면의 이미지에 형태를 덧입힌다. 단단하게 굳어진 펄프 작품은 작업의 손길, 흔적이 그대로 나타난 형태에 색칠을 하고 예전부터 그에게 존재했던 조형, 새롭게 표현하고자 했던 형태는 이렇게 재현된다. 직접적이며 구체적 표현이 배제된 그 아련한 기억의 조형을 그는 표현하고자 했다. 원초적 조형 형태를 표현하고자 했던 근래 몇 년의 작업은 그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속된 오랜 탐구가 현재의 삶과 과거의 시간이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온전히 작품 속에서 몰입하며 예술적 창조물을 토해내는 조각가의 길을 수십 년 걸으며 켜켜이 쌓인 그의 예술성은 그의 고향 마을 토담 위를 낮게 날아 마침내 그의 깊숙한 내면과 다시 조우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적 고뇌로 조각가 김성식은 왕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교육한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Hennry Moore)의 유산을 심오한 한국적 감수성과 연결하는 데 성공한 작가라고 해외의 극찬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국내 내로라하는 미술관 등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수차례 관련 수상을 하는 것 또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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