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시집 <사슴>(1936),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1936)

  • 입력 2013.04.08 14:25
  • 기자명 홍이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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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홍이종 시인’의 한국 근·현대를 움직인 ‘100권의 책’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책을 가까이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성공할 확률이 높고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인간으로서 더 차원 높은 품위와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책은 한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한 차원 높게 고양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와 여러 세대를 지나며 읽히는 밀리언셀러는 한 국가와 민족의 성숙을 견인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본지는 한국의 근?현대를 움직인 100권의 책을 선정, 그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본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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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시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드러낸 천재
백석의 시집 <사슴>(1936)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전문)

한국 근현대 시인으로 민속적 시어를 새롭게 표현한 백석의 시집 <사슴>은 근현대문학의  표현의 다양성을 보여준 백석의 첫 시집이다. 인문학의 기본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백석의 시편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빛나는 민속적 시어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은 대한민국 분단의 비극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평북 정주 출생으로 ‘조선일보’ 교정직과 함흥 영생여고 교사로 재직한 바 있는 그는 고향의 회귀성을 중요 시제로 선택하고 자기 세계관의 중심에 인간정신의 기본인 ‘사람’과 ‘고향’에 관한 새로운 시의 언어를 덧붙여 시의 집을 세웠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고향의 풍경을 그린 연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방언과 풍물의 시어를 표현한 ‘남행시초’, ‘서행시초’, 만주의 생활에서 오는 고향의 풍경을 형상화한 ‘북방에서’ 등은 오늘날까지 독자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여우난’, ‘곬’, ‘족’ 등 새로운 인문적 시어들을 사용한, 아름다운 시들을 소개한 시집 <사슴>을 통해 백석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민속신앙에 천착한 시인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운명적 인연을 우선한 개인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시인으로뿐만 아니라 번역가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던 백석은 한국인의 토속적인 정신에서 기인하는 빛나는 시어를 유산으로 남기는 등 세계열강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과 조국의 혼을 찾아 애쓴 민족적 자존감을 보여 준 작가였기도 했다.

30 민족주의적 역사소설의 경지를 개척하다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1936)

<금삼의 피>의 저자 월탄 박종화는 동인지 <문우>, <장미촌>, <백조> 등에 시 ‘오뇌의 청춘’, ‘흑방비곡’을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한 후 1935년 ‘매일신보’에 소설 <금삼의 피>를 발표, 소설가로 거듭나면서 역사소설을 자신의 문학적 테마로 삼았다.
박종화는 후일 “국민 개개인이 조선인의 정신을 되찾기를 염원하며 <금삼의 피>를 썼다”고 고백했다.
<금삼의 피>는 조선조 성종(1469~1494)과 연산군(1494~1506) 시대 궁중의 파벌 싸움을 중요 소재로 드라마틱한 구성의 역사소설로, 왕권의 승계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군상의 정치적 야망과 권력에 대한 지향, 파멸 등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민족주의적인 근현대 역사소설의 출발을 보여준 수작으로 월탄 박종화의 역사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금삼의 피>는 조선조 당시 왕권정치의 두 파벌인 ‘사림파’와 ‘훈구파’의 권력다툼과 왕권정치의 흥망을,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를 통해 잘 표현해냈다. 
당시 세계 철학사의 주류를 이룬 ‘허무주의’와 국가 간 ‘패권주의’를 소설의 구성요소로 선택한 <금삼의 피>는 소설의 주요인물인 연산군의 성장과정과 왕이 되기까지 인간의 성장과정에 모계의 부재로 형성된 연산군의 생활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이 작품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으로 발생하는 갑자사화(1504)를 주요배경으로 폐비 윤씨의 명예회복을 위한 연산군과 권력의 힘겨루기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제목인 ‘금삼의 피’가 보여주는 회화적 상상력은 인간의 피에서 보이는 생명의 의미를 작가의 생동감 있는 표현력으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금삼의 피>가 발표된 1930년대 한국 사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사회주의 문학이  주목받는 시대였으나 월탄 박종화의 민족적 역사관을 기반으로 태어난 <금삼의 피>가 국민의 주목을 받은 사실은 주목할 만하며 작가 개인의 뛰어난 소설 작법이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일 박종화가 발표한 소설 <다정불심>, <임진왜란>, <여인천하>, <세종대왕>과 번역서 <삼국지> 등 역사의식이 투철한 작품들을 다수 발표해 민족주의자로서의 행로를 보여준 월탄 박종화는 조선의 정신인 유교의 교육으로 성장해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에 자신의 성심을 다한 국민적 작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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