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비극적인 전쟁

  • 입력 2013.04.08 14:15
  • 기자명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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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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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비극적인 전쟁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북한-미국 간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약 3년 1개월 여간 지속된 동족 전쟁이었다.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며 간혹 ‘한국내전’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한국전쟁’이 다양한 용어로 사용되는 것은 그만큼 용어 사용 주체 간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특히, 아직도 ‘휴전’ 상태임을 고려한다면 ‘한국전쟁’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군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450만 명의 인명피해를 보였던 한국전쟁은 이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그나마 대한민국에 남아있던 43%의 산업시설과 33%의 가옥들이 전파되는 등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비극의 전쟁’이었다.

분단의 고착화 이끈 전쟁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 분단의 결과로 이는 급조된 미국의 정책결정 때문이었다. 미·소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차례 서울에서 회의를 가졌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UN에 한반도 문제를 이관했다.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UN에서도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두 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간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침략했다.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은 미 행정부는 이 사건을 UN의 틀 안에서 해결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즉각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침략문제를 제기했다.  
전쟁의 초기, 한국군은 전투력의 열세와 지휘체계의 결함으로 북한군에 완전히 압도되었으며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했다. 전쟁이 발발해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1950년 8월, 낙동강을 경계로 한 경남, 부산지역까지 몰리며 수세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 아래 1개 군단병력의 UN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돼 성공함으로써 UN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경인지역을 장악한 UN군에 의해 보급로와 후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남북으로부터의 협공으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산악지대로 도피함으로써 북한군 주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UN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
UN군이 급속히 진격해 38˚선에 접근하게 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섬멸하도록 명령한 데 이어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으로의 진격을 승인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10월 1일 한국군만을 38°선 이북으로 진격시키고 UN군은 38˚선에서 대기했다가 10월 7일 UN총회에서 북한 진격 결의안이 통과된 후 북진했다. UN군은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 일부 부대가 압록강에 도달했다.

상처만 남긴 ‘정전체제’, 60년간 지속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UN군은 후퇴해야 했다. 드디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길어진 병참선에 미국 공군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공세가 크게 둔화돼 UN군은 서울 남쪽 약 50km 지점의 평택과 원주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 2월 UN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고 차량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국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UN군의 사기를 회복하고 1월말에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전장을 한반도에 국한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중국본토의 전략적인 표적에 대한 공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UN군 측과 공산군 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때부터 지리멸렬한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에 임하는 양측의 태도는 전적으로 상반된 것이었다. 휴전회담 중 가장 논쟁이 심했던 세 가지 사항은 첫 번째, 모든 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공산군 측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UN군 측의 주장이었다. 공산군 측이 북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반면 UN군 측은 현 전선의 유지를 주장한 것과 포로교환 문제가 그 나머지 문제였다.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으며 8개월 간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 3월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의 사망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회담은 재개되고 포로교환 문제도 합의에 도달했다.
양측은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각각 2km씩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전투행위는 종식되었다.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자 현 분단 상황을 고착시킨 한국전쟁은 이렇게 매듭이 지어지면서 이후 한반도 정세를 만든 제1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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