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그리움과 애정을 옮겨 닮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유혹, 그것이 바로 나의 그림이다”

‘자연의 리듬’의 화가, 서양화가 김경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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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는 그녀의 ‘자연의 리듬’ 연작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꽃이 떠 있다. 우리 모든 존재가 한 송이 모란처럼 떠 있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 자연의 리듬을 타고 떠 있는 중이다.” 한 비평가는 그녀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고서 작가의 엄청난 드로잉과 커다란 캔버스 작품에 놀랐다고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열정”
 실은 그녀와의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이미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녀 안에 자리한 무한한 가능성과 열정이었다. 작가가 화실 겸으로 쓰는 거실 한 쪽 벽면에는 커다란 150호 캔버스의 모란 그림이 눈을 압도했다. 그녀가 요즈음 작업하고 있는 연작 시리즈였다. 꽃 중에서도 모란을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의 그림은, 과연 모 수필가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광막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주변 전체를 황홀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보며 덜컥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눈이 안 좋기 시작하면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도 그랬고, 얼마 전까지도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과 작업 차 나간 출사에서도 종종 다치곤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 안타까움은 대단한 그림만큼이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진실한 인간미와 지혜 때문일 것이었다.
 “요즘도 초대전이 자꾸 들어오지만 힘에 부쳐서 예전만큼 작업이 어려워요. 5월에 강남 청작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질 예정이에요. 크진 않은 갤러리지만 서울아트페어나 해외 아트페어에 다양하게 참여하실 정도로 여기 관장님께서 정력적이세요. 10월에도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에 참여가 계획되어 있고요.”

“대작의 탄생”
 키아프(한국 국제아트페어)도 초대받았지만 역시나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개인전을 하면 2~30점을 작업하는데, 대형 작품에 욕심이 많은 그녀의 성격 상 체력 소모가 아주 크다. 워낙에 정렬적인 터라 요즘도 그녀는 자연과 풍경을 담기 위해 열심히 다닌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래픽을 활용한 작업에 새롭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비바람이 칠 때 사진이 오히려 더 좋아 굳은 날씨를 일부러 택해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일부 출력해서 캔버스를 짜고, 가감해서, 아크릴과 색 변환을 거쳐, 자연소재의 돌가루나 유리가루 등 수작업에다 마무리 코팅까지 이만저만 복잡한 과정이 아니란다. 젊었을 때 이 정도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었다. 초창기 사실적 그림에서 정물화와 풍경 작업을 20여 년간 했고, 크로키와 인물 작업으로 그만큼이나 시간을 보냈다.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열정은 오히려 더 뜨거워져 컴퓨터아트를 배우고자 미국 유학을 떠났을 정도다.
 “제 작품을 통해 실내에서도 마치 세상에 나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음울한 회색바탕에 파스텔톤의 자연이미지를 넣었어요. 도시의 이미지는 분할화면에 기호 등으로 정리하고, 그 다음 자연은 라인드로잉(음영을 넣지 않고 선으로만 형태를 표현하는 드로잉 기법)으로 처리했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묻더라고요. 미국 유학 동안에도 쉴 새 없는 작업과 공부로 망막수술까지 받게 되면서 하는 수 없이 몇 년을 붓을 놓게 되었어요. 그 때 많은 것을 느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 스타일의 그림이에요.”

“자연의 리듬 연작”
 김경자 작가의 ‘자연의 리듬’ 시리즈 연작은 거대한 배경 전체에 악보가 흐르고 그 악보 위를 커다란 한 송이 꽃이 춤을 추듯 흐른다. 마치 음악과 미술과 자연이 새하얀 허공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듯하다. 사진, 컴퓨터, 수작업 등등 한 폭의 회화 속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종합적인 예술인 것이다. 2008년도에 처음 이 자연의 리듬이 공개되었을 때 평단과 대중은 모두 깜짝 놀랐다. 화가 스스로는 2010년에 보다 발전된 세계관으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가 절정이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2010년 예술의 전당 개인전 시 아예 주최 측에서 그녀의 작품을 3점이나 샀으니 말이다. 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외교부, 외국 한국 대사관에까지 그녀의 그림이 들어가 있거나 소장돼 있을 정도다.
 “예전에 비해 지금 작품은 스스로 비약적이라고 느껴요. 하지만 여기서도 오래 머물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성격도 성격이지만, 항시 지금에 안주하지 말고 늘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편이죠. 사실 최근 몇 년의 연작만 비슷하지 전에는 다 달랐어요. 인생을 통해 정말 많은 단계를 거쳐 왔죠. 당분간은 자연의 리듬 연작을 고집하면서 스타일적으로 변형을 기하려고 해요. 제 작품을 너무 좋아하는 대중이 저의 변화를 낯설게 느낄 수도 있을까 두려운 점도 있긴 해요. 하지만 지금에 안주만 할 수는 없는 것이죠. 전에는 집 안에 암실도 갖고 있을 정도였어요. 회화를 하기 위해선 모든 것을 알아야 하거든요. 도예작업에 테라코타, 자화상까지 그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보려 했어요. 영화, 연극, 클래식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고, 지금도 공부 차원에서 구에서 여는 컴퓨터교실을 2년째 다니고 있어요.”
 김경자 작가는 국내 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미국과 파리에서 여러 번의 개인전을, 그룹전은 파리에서 매년 열었다. 한국에 비해 외국 전시회에서는 무명작가에게도 잡지사 회장과 평론가 각 단체인들이 모여 열성적으로 축하를 해 주는 문화가 참 인상 깊었다고 했다. 덕분에 스스로 안목도 높아졌고,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이제는 예전처럼 왕성한 나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대를 깊이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애틋한 가족이야기”
 그녀의 딸 또한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이다. 우스갯소리로 한 집 안에 두 명이나 순수미술만을 고집할 순 없지 않느냐는 남편의 말에 딸은 지금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림을 잘 그려 교과서에 나오기까지 한 실력인 지라, 자연스레 인테리어학과 또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단다. 6·25 미군참전용사를 위한 드로잉프로젝트도 했는데, 바로 해당 파티에서 지금의 남편인 재미교포를 만나 뉴저지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아들은 미국에서 기업금융을 전공해 현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있다. 그녀의 애틋한 가족얘기는 계속되었다. 통역장교 출신인 그녀의 남편은 비즈니스맨이지만 20년 이상 비엔나에 다니며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국에서도 유수의 대학 음악과정을 거쳐, 지금은 실제 바리톤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4년 전에는 직접 대한민국 성악인 동호회를 만들어 창립회장으로 아마추어들도 자유로이 음악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봉사와 절약이 몸에 배어 있지만, 교육을 위해서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화가 스스로도 그런 남편을 덕을 많이 봤다고 고백했다.
 “82년도인가 불란서 유학시절, 한 번은 귀국하자마자 남편이 깜짝 놀랄 파티를 열어주었어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글쎄 집 안 전체에 제 그림을 걸어 전람회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겠어요. 남편은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동양화가셨던 제 어머니의 그림도 직접 자신이 사서 바이어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인터뷰 말미에 김경자 작가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오고 갔다. 자신처럼 화가셨고, 자신보다 더 대단한 열정과 지혜를 품은 어머니셨지만 치매로 인한 투병생활 끝에 결국 숨을 거두셨다. 기자에게도 그 회한과 안타까움이 전해져, 간절함과 목마름을 다 풀고 가시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연은 견디기 힘든 유혹”
 “자연과의 상생의 리듬”, “무위자연의 감성”, “자연의 리듬 속에 깃든 회화적 조형성”, “표현주의적 시각과 구상적 이미지가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혼재되어 있는 작가세계” 등등 그녀의 작품세계를 평하는 말들은 다양하지만, 이미 그녀는 오래 전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다 말해 놓았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옮겨 닮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 바로 나의 작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건넨 화첩을 다시 열어 보았다. 그림과 함께 유독 한 구절이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나는 사물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가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구상이 있고, 내가 구상적인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추상이 있다. 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나 자신의 자연과의 은밀한 교감을 위해, 감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나 자신과 자연을 하나로 묶는 행위를 되풀이하고 싶을 따름이다.”
 앞으로도 소망과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화가의 대답은 오히려 우문현답처럼 너무도 간단했다. “좀 더 그릴 수 있으면 좋겠고, 좀 더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고, 좀 더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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