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식

  • 입력 2013.04.08 13:57
  • 기자명 김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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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식
                           
김인석|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중핵교과 객원교수, 철학박사

 

우리 삶의 경험은 가치와 의미 세계에로 지향적-초월적으로 살아가는 경험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시킬 책임을 지고 있다. ‘로고테라피’는 실존분석을 통해 인생과업(의미)에 대한 책임을 일깨워준다.
K씨는 한 대가의 서체를 습득하기 위해 7년을 노력했다. 노력의 결과, 비록 모방이지만 대가의 서체와 흡사한 경지에 도달했다. K씨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했다. K씨의 서체가 현재 모 대학교 기념관의 기념석에 아로새겨진 채 보존되어 있다.
K씨의 우울증이 심한 어느 날이었다.
“노인정 서예실에 8년 째 아무도 오지 않아요. 단 한명도요.”
“서예실 창문에 간판용 썬팅 한다는 거 어떻게 됐나요?”
“아직... 하지 않았는데... 소용없을 거예요...”
“왜요?”
“인터넷에서 서체 받으면 되는 데... 누가 받으려고 합니까... 이젠 학원에서 배울 애가 없을 거예요. 모든 게 아무 소용없어요.”
K씨의 안색이 시들해졌다.
“소용없다니요? 무슨 뜻인지요?”
“손으로 직접 쓰는 건 아무도 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미끈한 글자 뽑아서 마구 복사하면 되는 데... 이제 서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서예는 죽었어요.”
K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서예가 죽었다니요?” 필자가 정색을 하며 힘주어 물었다.
“...”
“천만예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하나 물어 봅시다. 반 고호 아시지요? 화가 말이에요. 그 양반 그림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거 보셨지요? 복사판들이 난무한다고 반 고호가 직접 그린 그림의 값어치마저 떨어질까요? 원본 말이에요. 원본.”
K씨가 유심히 들었다.
“어느 걸 더 값어치 쳐 줍니까? 공장에서 대량으로 기계로 찍어낸 거하고 수제품하고... 어느게 더 비쌉니까?”
“물론... 손으로 만든거지요...”
“보세요. **선생님이 손으로 직접 쓰는 서체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 거 아닙니까? 가치가 말이에요. 가치가... 원곡체의 경지에 도달하셨는데... 진짜 힘있더라고요... 대학 기념관 돌에 새겨진 서체 정말 힘 있더라고요. 원곡체를 그대로 쓰는 서예가가 있나요? 현재?”
K씨가 생기 도는 얼굴로 말했다.
“원곡 선생 생전에 제자가 많았는데... 서체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유일한 계승자인데... **선생님이 손을 놓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원곡체가 끊기는 거 아닙니까?”
“예.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K씨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필자가 K씨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질문의 각을 예리하게 세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그래서는 안 되지요.”
“**선생님 개인 영달이나 목숨 생각하는 걸 넘어서 서예 자체가 어떻게 되지요?”  
“끔찍하지요... 저 개인 생각안하고... 그런 거 이전에요...”
“설사 서예실에 아무도 오지 않더라도... 인터넷 복사판이... 하루에 수만 장 찍혀 나오더라도... **선생님은 작품을 쓰실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닙니까?”
“절 이렇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기념관 돌에 새겨진 서체는 대한민국이 폭삭 주저앉기 전에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앞으로 아무도 서예를 하지 않아도 그 작품은... **선생님의 서예가 정신과 솜씨는 빛을 발하며 그 대학교를 밝히고 있는 것 아닙니까?” K씨와 이어지는 화제는 서예실 경영 아이디어에 관한 것이었다.
K씨는 삶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어느 날 K씨가 말했다.
“혼자 있는 방안에서 고독에 떨다가 머릿속에서 문득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렇게 정신없이 외로움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겠다. 세월 허비하지 말아야겠다. 글씨를 써야 할 내가 외로움 같은 데에 정신 빼앗기고 있으면 되겠나?’하는.”
K씨는 서예작품 창작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K씨는 그날 대화 중 외롭다는 하소연을 하지 않았다.
그 후도 마찬가지였다.
K씨는 심리적-사회적으로 생활의 곤궁에 깊숙이 빠져 있는 사람이다. 자살의 위험이 있을 정도로 깊이 불행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K씨의 자살기도를 막기 위해 모든 심리적-사회적인 불행의 원인들을 없애 줄 수는 없다. 죽은 어머니를 되살릴 수도 없고, 돈벌이가 잘되는 직업을 구해줄 수도 없었다. 폐지 줍는 일을 그만 두고 음식점에 취직하도록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모든 권유나 조언에 대해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노이로제적으로 반발했다. 그런 시도들은 오히려 K씨의 불행의식과 노이로제를 심화시켰다.
로고테라피적 상담의 묘미는 K씨가 심리적 역경과 소유상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K씨가 자기 자신의 (이미 전반성적 존재론적 자기이해라는 인간 특유의 능력에 힘입어 K씨 자신이 알고 있는) 생존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K씨가 의미 발견에 힘입어 외적운명의 시련과 자신의 불행을 심리적으로 견디고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을 다루는 로고테라피스트는 내담자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자기의 생명의 의미와 존엄성을 느끼고 인식하게 한다. K씨의 경우가 증명하듯이, 비관과 비탄에 빠진 사람이 급격한 자기 부정에로 심리적 운동을 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삶의 과업에 대한 확고한 임무의식이다.
K씨에게는 서예 창조를 하는 것이 가장 고유하고 진실된 의미에서 삶의 임무, 즉 천직이다. 이 천직은 자기 이외 다른 누군가가 대신 수행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유한한 운명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즉 개인의 생명은 일정한 생물적 시간이 경과되면 사라지게 되며, 이 생명은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다. 이 생명의 일회성이 천직 수행에 대한 삶의 임무의식을 강화시킨다.
이 천직임무의 독자성과 주어진 생명의 일회성에 대한 인식이 생명의 소중성과 가치 의식을 증진시킨다. K씨는 외로움에 빠져서 ‘세월 허비’하는 것에 대해, 즉 생명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낭비하는 것에 대해 가책을 느꼈다. 이 가책이 의미의 부름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중심특성을 이루는 양심의 능력이 일깨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는 K씨의 어두운 마음의 세계에 양심의 가책이라는 소극적 형태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마치 등대의 불빛처럼 반짝였다. 
가책은 바로 생명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의미를 실현시키는 고유한 임무를 아직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식이다. 이것은 소극적 상태다. 하지만 K씨는 이미 누스(Nous)의 능력에 의하여 절망의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이미 운명의 임무 차원과 책임 차원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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