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의식 선각자, 일랑 이종상 화백

통일을 위한 문화동질성 회복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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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권 신사임당 작품 앞에서
5만원권 신사임당 작품 앞에서

[서울=피플투데이] 이지희기자=일랑 이종상 화백, 재학시절 당대 한학자 월당이 지어준 그의 아호 일랑[一浪]은 크고도 유일한 파도를 의미한다.
이종상 화백이 만들어 내는 파도는 늘 ‘민족의 혼’을 담고 있다.
매 번 일으킬 때 마다 역사가 되는 그의 파도는 결코 멈출 줄을 모른다.
역사의식의 선각자로서 한국의 고유한 민족문화를 주창해온 그는 오늘도 민족의 혼을 담아 역사에 남을 새로운 파도를 출렁이도록 하는데 여념[餘念]이 없다.

이종상 화백은 타고났다.
‘타고났다’라는 말은 개인이 일궈온 노력과 환경 등 후천적 요인을 소홀이 여기는 운명론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미 내재된 뛰어난 성품이나 출중한 능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분명하게 인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종상 화백에게는 ‘타고났다’라는 말이 제격이다. 그런데, 타고난 것만 같은 이종상 화백의 인생사를 들어보니 노력과 후천적 요인은 절대 간과 될 수 없음이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길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영향이 있었다고.

“너는 질리지도 않니, 왼 종일 그림공부만 하게?”
 이종상 화백의 모친은 그림만 그리는 어린 그를 바라보며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 당시는 예술이 공부라고 여겨지기 힘든 시대였다. 그러나 이 같은 모친이 있어 그림도 공부라는 생각이 그에게 당연하게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 왔어요. 우리 집에선 실컷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죠. 친구들이 오면 간식을 주려는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처음 온 친구들은 누군가 걸어오는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종이를 숨겼어요. 하하, 지금 생각하면 참 재밌는 일화죠. 원예학을 전공한 아버지도 본래는 화가를 꿈꾸셨던 분이었어요. 젊을 적 아버지의 사진 속에서 아브라함 링컨 초상화를 그린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대 지주이셨던 할아버지는 집안에 환쟁이가 나온다며 반대했고,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꿈을 제가 대신 이뤄주길 바라셨죠.”
그토록 화가를 갈망한 아버지의 예술혼과 어머니의 깨어있는 인식이 결합돼 이종상 화백을 좀 더 빠르게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도록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림의 격은 인격이다”
 그가 대전 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 새로운 교장선생님이 취임하는데, 이 분의 취임으로 이종상화백의 인생에 나비효과가 일어나게 된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땐 미술수업이 없었어요. 그 당시는 전부 대학진학을 위한 주요과목에 몰두할 때였죠. 그런데 새로 오신 박관수(朴寬洙) 교장선생님이 ‘미술 수업이 없는 학교가 무슨 학교냐’며 미술선생님 한 분을 불러 오셨어요. 그런데 중·고등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이 없는 선생님이었어요. 교장선생님께서는 그 분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격증을 취득할 것을 제안하셨더라고요. 그 미술선생님은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권위의식이나 체면치레 따위 없이 우리들과 함께 공부하고 배우며 발전했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결국 자격증을 취득하셨죠. 미술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참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 분이 하셨던 말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아요. ‘그림의 격은 곧 인격이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통해 인품을 가르치러 왔다’라고 하셨죠. 후에 동양화를 공부해보니 미술선생님의 말이 딱 맞더군요. 나부터 인격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그리고 인품이 드러나지 않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거든요. 이것이 바로 동양의 예술가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후소론(後素論)임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이런 분을 알아보고 모셔오신 교장선생님의 안목이 정말 대단하시죠. 다가올 세상에서 더욱 빛이 날 예술의 위상을 알았고,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적성을 잘 알아보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내 인생의 소중한 분들이죠.”

역사의식의 선각자로서 시대정신을 아우르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진학한 이종상 화백은 장욱진과 권옥연, 손동진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자신이 서구의 것에 경도되는 것 같은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돼 우리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때부터 그는 월전, 심선, 산정, 남정 밖으론 청전, 이당선생을 만나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4.19 혁명에 앞장서며 청춘의 시작점에서 본인만의 예술적 가치관과 남다른 역사의식을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4·19혁명 때 독재정권에 맞서 문리대 시위대 맨 앞에 있었습니다. 미대생이었지만 유도부도 했기에 많은 학생들을 경호했죠. 그러다 경무대 담장 앞에서 오른쪽 종아리에 총알이 스치는 바람에 다리를 다쳤죠. 부은 다리를 겨우겨우 이끌고 부근의 민가로 피했지만 결국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들어갔어요.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발표됐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죠. 이런 일을 겪은 후 혁명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대장간을 그렸습니다. 무뎌진 연장의 칼날을 강인하게 다시 세우는 대장간처럼 민주화의 기능을 되살릴 수 있게 하는 혁명의 중요성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군사정변이 일어난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의 의미를 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첫 특선을 받게 되었죠.”
이 화백은 당시의 경험이 예술세계에 녹아들어 은유적으로 혁명을 암시하는 작품을 창작해내  3회 연속 특선이라는 영광을 얻게 되고 국전사상 최연소 추천작가라는 명예를 안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직후 국전 추천작가가 됐고 30대 초반엔 이미 국전 심사위원에 올랐다.

1977년-최초로독도진경개인전을연이종상의독도정상작업
1977년-최초로독도진경개인전을연이종상의독도정상작업

 그런 그가 화가로선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 세계 첫 번째 독도 화가이면서 최초의 독도 NGO문화운동가가 됐다.
“진경산수화를 그린 겸재 정선이 독도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당시 최순우 국립박물관장을 찾아가 다른 작가가 그린 게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어요. 학예사들을 동원해 3개월 동안 조사했죠. 한국에 독도 작가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치안본부에 독도 입도 신청을 했습니다. 허가를 받고나니 일본을 조사하지 않은 게 걸리더군요. 다시 최 관장을 찾아가 일본에 다게시마 (독도의 일본명칭) 판화 같은 게 있는지 조사를 부탁했죠. 단순히 그림 하나가 아닌 지도의 어버이 격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이 화백은 최초의 독도화가가 됐고, 1977년 동산방 초대로 ‘독도 진경전’을 열었다.
“전시회에 ‘진경전’이란 이름을 붙이니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어요. 왜 개인전에 케케묵은 조선시대 진경을 붙이냐는 것이었죠. 그러나 전 ‘겸재의 작품은 양식이 돼서 박물관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 분의 생각은 우리가 영원히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반론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아요.”
지금과 달리 독도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없었던 그 때, 그는 누구보다도 독도의 상징성을 먼저 깨닫고 예술작품으로 그려냈으며 그에 멈추지 않고 ‘독도문화심기 운동’으로 이어갔다. 정부가 세계에 내보이는 책에도 그의 그림 Dokdo가 들어가 있고 그의 손에서 탄생한 독도그림은 현재 600여 점이 넘는다.

북한방문 덕흥리고분벽화 탐방
북한방문 덕흥리고분벽화 탐방

 일랑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회화의 자생성과 우리 문화의 근원을 찾아 나서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고구려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고구려 벽화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난 오래전부터 고구려를 연구했어요. 죽의 장막이라는 극단적 분단시대라 함부로 연구하지 못할 때였지만.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 의상 등 모든 패턴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현대 미술도 벽화에서 시작됐고, 벽화를 가진 민족은 원시시대부터 족보 있는 문화 DNA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문화 원류가 있는 그 곳에 대해 공부는커녕 연구도 마음대로 못했지요. 그리고 교과서에 수렵도 쌍영총이 나오지만 누구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어요. 고구려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중국에 있고 나머지는 북한에 있어서 제대로 연구할 수 없는 시기였으나 고구려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썼던 [고대벽화의 사적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이 1972년 한국민족문화논총에 33인의 우수 논문으로 실렸어요. 그 당시에는 북쪽을 연구하면 잡혀가기 일쑤였죠. 그래서 나도 남영분실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그러나 무혐의 처분을 받아 이 후에 자유롭게 고구려 연구를 할 수 있었죠.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중국으로 들어가 고구려 고분 대부분을 조사했어요.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세계의 동굴벽화를 모두 연구했어요. 이를 통해 외국 동굴벽화와 고구려 벽화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곳과 달리 고구려 벽화는 습한 동굴에서도 수 천 년을 버텨낼 수 있는 독자적인 기법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인지 북한에서 나를 주시한 듯해요. 1999년 8월 말 아태평화위원장이 나를 초청했어요.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강서대묘 등 북한 내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서둘렀기 때문이죠. 그 전에 일본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구명목으로 유물만 가져가고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았더라고요. 국내로 돌아와서 북한의 필요사항을 통일대비, 민족의 문화동질성 회복을 위해 당국에 간곡히 전했지만 끝내 묵살돼버린 점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한국벽화연구소에서-동유화작업
한국벽화연구소에서-동유화작업

 이종상 화백은 1997년 프랑스 문부성의 초대를 받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샤를르 5세홀에서 생존 작가 최초로 초대 개인전을 열어 대한민국 예술의 자존심을 세우고 아름다움을 펼쳐보였다. 설치벽화(6m×72m) ‘원형상-마리산’이란 작품으로 병인양요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했는데, 표현방식은 우리나라 자생 문화인 한지설치벽화를 선택해 한국 창호문화의 배면조명법을 세계최초로 시도하여 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텅 빈 충만의 아름다움’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3차례나 해를 넘기며 앙코르 요청을 받았고 총 127만여 명이 관람했다. 이에 루브르 박물관 측은 설치벽화의 영구비치를 요구했지만 이 화백은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이행하면 응하겠다고 답했다. 프랑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난색을 표하자 그는 “한국 작가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억만금을 준대도 팔지 않고. 철수하겠다.”라며 작품을 철거해버리고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애국심, 그리고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예술가이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당당히 내세운 덕분일까. 그에게 운명 같은 일이 다가온다. 1977년, 오천 원 권의 율곡 영정을 그리고, 30여 년 후에 또다시 한국 최고액 화폐인 오만 원 권의 신사임당을 그리게 된다. 본디 화폐영정은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그리게 한다. 또한 화가에게 사상은 물론 경제와 관련한 모든 부분에서 일체 청렴결백을 엄격히 요구한다. 화폐의 영정을 그린 후 불명예스러운 일을 일으키면 화폐와 관련한 모든 이미지가 훼손되기 때문에 화폐영정작가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많아 불안한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그동안의 인생을 검증할 수 있는, 남은 생이 그리 많지 않은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종상 화백은 하자[瑕疵]없는 결백[潔白]한 삶이었기에 가능했다.
“쟁쟁한 화가들 사이에서 37살의 나이에 화폐를 그리게 된 건 정말 영광이면서도 얼떨떨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오천 원 권은 이당 김은호 선생이 그리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됐고, 그 분이 대신할 사람으로 저를 추천했기에 가능했지요. 천 원 권을 그린 현초 선생, 만 원 권을 그린 운보 선생도 모두 이당 선생의 제자였어요. 저 역시 이당선생으로부터 영정의 전통기법을 배웠죠.”

 이렇게 살아온 삶, 자체에 수많은 역사가 담긴 이종상 화백은 현재 신리성지 성당에 들어갈 순교기록화를 봉헌제작하며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독교문화가 들어온 지 수 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때 먼저, 앞서서 행동하는 ‘그’이기에 이번 순교기록화는 더욱 기대가 된다.
“소중한 둘 째 딸을 잃은 후 천주교에 귀의했어요. 마음을 다스리며 많은 종교 작품을 만들었고, 이번 작품에는 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가랑비가 내리던 겨울날, 이종상화백과 함께 파주에 위치한 작업실에 들렀다. 직접 깎은 종려나무 목필로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작품에 영혼이 온전히 깃들지 않고서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고구려 벽화는 천년이 넘도록 끄떡없이 버텨냈습니다. 나도 이 순교기록화가 고구려벽화처럼 뛰어난 보존성을 갖도록 모든 기술을 동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며 그 시대로 빠져들어 끊임없는 대화의 시간을 통해 철저한 종교적 고증을 이뤄내려 부단히 노력했어요. 앞으로 영원할 작품이기에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함 없이 역사성과 종교성, 예술성과 보존성, 그리고 영성의 다섯 가지를 제대로 갖춘 순교화를 만들겠습니다.”

 선각자는 남보다 먼저 깨닫기에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어내기 힘들고 그래서 때로는 박해와 비난을 받으며 외롭고 험난한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할 때가 많다. 이종상 화백 역시 그랬다. 홀로 독도를 외치고, 고구려 문화를 알렸다. 그리고 한결같이 우리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말했다.
이 화백이 보여준 역사의식은 무수히 변화하며 각기 다른 시대정신을 주장해온 한국 역사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선각자가 힘들게 길을 냈기에 우리가 조금은 수월하게 뒤따라서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민족문화는 참 대단합니다. 한지문화, 한복, 한옥, 오방색문화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 문화를 소홀히 여기고 외국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 같아 보여요. 그러다보면 올바른 정체성을 세울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면 내가 속한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합니다. 그 때 비로소 올바른 정체성이 굳건하게 자리할 수 있죠. 그런 후에 자신의 전문 분야를 탐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교육 환경은 역사공부는 뒤로한 채 전문성만을 강조하는 분위기다보니 학문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전문성은 높지만 자신의 분야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전공바보’라는 말이 생겨났어요. 다가올 미래에는 자신의 전공분야만 고집하지 않고, 역사를 돌이켜보며 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모든 학문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과 포용력, 그리고 깊이 있는 사고력를 갖춘 전공자들이 가득한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일랑[一浪] 이종상은 굳건한 선각자의 모습을 가지고 그의 아호처럼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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