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들어 하늘을 베다

먹을 품은 한 점은 산이 되어 솟고, 선은 물이 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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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피플투데이] 탁정하기자=서예는 점과 선(획劃)의 태세(太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조화되어 완벽한 조형미가 이루어진다. 점과 선의 구성과 비례 균형에 따라 공간미(空間美)가 이루어지고 필순(筆順)에 따른 운필의 지속완급(遲速緩急) 강약으로 율동미를 표출하게 된다. 글자를 소재로 하는 서예는 오랜 세월동안 학식과 연마를 겸해야만 비로소 그 품격을 제대로 갖출 수 있다. 먹은 검정색이지만 오채(五彩)를 품고 있다. 농담(濃淡)·윤갈(潤渴)·선염(渲染)·비백(飛白) 등이 운필에 따라 영묘(靈妙)한 표현을 하는 것처럼 격조 높은 서예가의 작품에는 작가의 고아한 기품과 철학이 배어 있다. 동양에서 서예나 동양화에 높은 품격을 요구하는 것은 청고고아(淸高古雅)한 작가의 정신과 기품이 있어야만 비로소 작품에 발현되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는 좋은 글씨나 그림에는 문자향, 서권기가 배여 있다고 했다.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고아한 뜻이 들어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속에 고아한 뜻은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서 발현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시대에 문자향, 서권기의 품격을 품은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의 ‘목멱산방’(木覓山房)을 찾았다.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은 1948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묵동 명문 서예가 집안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깊게 배인 묵향 속에서 자란 그는 몰래 선친의 붓과 먹을 꺼내 글씨를 연습하곤 했다. 붓을 잡고 호흡과 필법에 따라 흔들리고 반듯해지는 글씨가 재미있던 말수 적던 소년은 훗날 방화로 소실된 ‘국보 제1호 숭례문’의 복구 상량문을 써 아픈 역사를 후손에게 전하는 중책을 맡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다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면서도 예술가의 어려움을 알기에 만류하던 선친이 끝내 손에서 붓을 놓지 않던 그를 지켜보던 어느날 “글씨는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한번 잘못 익히면 평생 못 고친다.”며 건네준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법첩(法帖)과 함께 가업을 이으라는 뜻이 담긴 소헌(紹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 후 가학으로 서예를 배우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선친과 교우하였던 이시대의 서예 대가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 사사를 받게 된다.

숭례문복구상량문
숭례문복구상량문

일중 김충현의 제자가 되다
그의 스승 일중 김충현은 뼛속 깊이 선비 의식이 배어 있는 한국 서예의 거장으로 일찍이 ‘동방연서회’와 ‘일중묵연회’를 만들어 한국 서예계에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헌(紹軒)이 기억하는 스승은 공사석을 막론하고 말이 적었던 분이었다. 한 가지 일관된 말씀은 “화려하게 수식하는 것은 장졸(藏拙 · 자기의 변변하지 못함을 감춤)이다.”는 말씀으로 이는 비단 서예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은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작품 체본을 잘 해주시지 않으셨다. 스승의 작품 체본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예의 학습방식 이었으나 작품 체본을 해주지 않으니 제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글씨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대지 말라! 스승에게 배우되 그대로 닮아가지는 말라!”는 말씀에는 제자의 독창성을 끄집어내 예술적으로 독립시켜 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후에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은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인 22세의 나이에 ‘우리 글씨 쓰는 법’ 이라는 책을 낼만큼 한글 사랑이 남달랐다. 스승의 영향으로 그 또한 한글 서체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가 국내외 전시회를 열 때 마다 수많은 한글 작품을 선보일 만큼 그의 한글 사랑은 깊고 유별나다.  
서예가의 길을 걸으며 그는 1969년 제18회 국전에서 첫 입선을 한 것을 시작으로 13년 동안 국전에서 9번의 입선을 했다. 그 후 많은 문제점을 보완하고 쇄신하는 의미에서 1982년 실시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퇴계 이황의 시 ‘조춘(早春)’을 정형화 되지 않은 대전(大篆 · 주나라 때 한자서체)으로 써서 출품하여 대상의 영예 수상하였다. 전서는 진시황이 문자통일을 한 것을 소전(小篆)이라 하고 그 이전 것을 대전(大篆)이라고 하는데 한자는 상형글자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고대 글자일수록 회화성이 강하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은 완숙한 조형미와 높은 예술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을 대회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첫번째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이다. 

2012년 ‘국보 제1호 숭례문’ 복구상량문(12m)과 뜬창방 휘호를 쓴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은 숭례문 복구 상량문을 작업하기 이전부터 경복궁 근정전 상량문 중수기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철거후 복원된 흥례문, 유화문 현판, 창덕궁 진선문, 숙장문 현판, 덕수궁 덕홍전  중수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 한남루와 주련, 현판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 부여에 백제문화단지 등 수많은 현판과 상량문을 쓰며 국내에서 중요한 역사적인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를 비롯한 유수한 뮤지움과 미술계에 1999년을 시작으로 16번의 초대전으로 이어진다. 그의 서예 작품은 독특한 조형감각과 원시적 회화성의 조화로 창의적 예술성과 철학적 품격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서예 작품이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뛰어난 조형성으로 표현되는 예술성과 더불어 그의 서예 작품에서 서구 현대미술의 ‘표현주의’ 사조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표현주의의 본고장인 독일의 슈트르가르트 린덴뮤지움 초대전과  10개월간 연장 전시된 라이프찌이 그라시뮤지움 초대전 에서 많은 사람들이 뜻도 모르는 글자로 표현된 생소한 동양의 서예 작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렇게 뜨겁게 열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독창적 서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소헌은 일부 서예가의 단순이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조형으로 저속한 선 만 을 나열하는 이들의 무모함을 경계하며 걱정한다. 그는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서예가는 없다’는 예부터 내려오는 말로 서예가는 어떤 장르보다도 오랜 시간의 연마과정과 학습의 필요성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흥례문
흥례문

  

왕대밭에 왕대 난다
그에게 당대 명필이었던 선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2009년 경남도립미술관 초대전인 ‘유당 정현복 탄생100주년 기념 특별전’ 준비과정에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선친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나면서 놀랍고도 벅찼던 심정을 말했다. 소헌(紹軒)의 선친은 해인사의 해인총림, 진주의 촉석루 현판등을 쓴 당대에 유명한 서예가 유당(惟堂) 정현복 선생이다. 평양 부벽루와 쌍벽을 이루는 진주 촉석루 현판을 쓴 유당은 해박한 한학 지식을 바탕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필법으로 당대에 명성을 날렸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옛말을 실감 나게 한다. “글씨는 기교나 잔재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문기(文氣)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유당은 율계(栗溪) 정기(鄭琦),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14세 때는 산청의 신안정사(新安精舍) 석전병풍(釋奠屛風) 휘호를 할 만큼 그의 필치는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임당 하성재는 “유당은 어려서부터 천재라 불릴 만큼 글씨를 잘썼고 장성하면서 무엇이든 빨리 익혔고, 그는 한학뿐 아니라 거문고 ,창, 바둑에도 뛰어났다. 허지만 서도에만 정일(精一)하기 위해 아호를 유당이라고 하였다. 유당의 글씨는 아무리 빨리 써도 격을 다 갖추었고 부드럽게 된 부분은 연기나 가랑비처럼 생겼고 강하게 쓰면 창을 펼쳐 놓은 듯 하였다”고 평했다. 유당은 기예(技藝)만 중시하던 서예가와는 다른 선비형 서예가로 그의 글씨에는 ‘문기(文氣)’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서예계의 명망 높은 대가였다. 선친의 뒤를 이어 가업을 이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은 전통서예에 능한 고전주의자이면서도 전통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변주로 서예의 조형미를 추구하고 있는 실험가이기도 하다. 한글과 한문 서체에 두루 능하지만 그의 작품은 서예 작품이 가지는 글자의 조형성을 그만의 조형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서예의 기품을 표현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먹을 품은 붓이 허공을 가르며 찍은 한 점은 산이 되어 솟고, 선은 물이 되어 흐른다
2016년 새해에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그가 붓을 들었다. 검은색 두루마기를 벗고 한복차림의 그가 붓을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순 먹을 머금은 붓이 무심한 듯 허공을 가르며 찍은 한 점은 산이 되어 솟고, 점과 선 사이가 창해 같은 여백임에도 다시 보면 바늘하나 꼽을 자리가 없다. 이를 두고 등완백(鄧頑伯)이 “글자 획의 사이가 넓은 데는 말을 달릴 만 하고 조밀한 데는 바람이 새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백(白)의 자리를 살피고 나서 흑(黑)을 맞추어야만 신묘한 맛이 나오게 된다”고 한 것일까?

그의 붓이 찍은 점은 점이 아닌 솟아오른 산이다. 그의 붓이 그은 선은 선이 아닌 물이 되어 흐르는 듯하다. ‘인자요산 지자요수 仁者樂山 智者樂水’ 그렇게 눈앞에 산과 물이 펼쳐졌다. 그의 작품을 보면 남종화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품격이 느껴진다. 학식 높은 선비의 그림에 있어서 그림이 정확한 형상을 묘사하거나 진한 채색을 쓰지 않으면서도 느껴지는 은은한 품격을 그의 서예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다. 2004년 프랑스 쇼몽 시립미술관 초대전에서 미술관 관장이던 클로드아바 관장은 그의 작품을 보고 “당신 작품의 글씨는 평면이 아니라 조각처럼 입체로 보인다. 짙게 먹이 들어간 곳은 작품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흐린 먹은 앞으로 튀어나와 입체공간을 이룬다. 어쩜 조각과 서예가 이렇듯 가깝게 느껴진단 말인가!” 라고 찬사를 거듭했다.

예술로 승화된 조형미와 종이에 글씨를 조각한 듯 양감으로 표현되는 격조 높은 품격의 예술성을 가진 그의 작품이 앞으로 한국 뿐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아 한국 서예술이 가지는 문화적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 시대의 미감을 표출하고 한국 서단에 새로운 세계를 연 주역으로써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이 보여줄 새로운 작품이 목마르게 기다려진다.    

그는 올해 6월18일부터 7월23일까지 프랑스 ‘musee ultrillo-valadon’ 뮤지움초대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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