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양 날개로 난다”

  • 입력 2013.03.12 14:20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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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conomic Focus

“새는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양 날개로 난다”
둘이 될 수 없는 쌍생아, ‘성장’과 ‘분배’

‘성장(Growth)‘과 ’분배(Distribution)‘라는 두 개의 키워드는 경제 분야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의 발전 개념을 설명하는 큰 주제다. 이 두 키워드는 정치 분야에서 ’자유‘와 ’평등‘의 경우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장론자‘들과 ’분배론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회자되며 논쟁의 소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개념 가운데 어느 개념이 더 중시되느냐에 따라 한 국가와 사회의 경제 체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성장’과 ‘분배’는 어느 한 쪽을 포기해야만 하는 개념이 아니어서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쪽을 더 확대할지를 선택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우선 ‘파이’를 키워 놓은 후 ‘분배’를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아니면 공정한 ‘분배’를 실현해 가면서 ‘파이’를 키우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성장이냐, 분배냐’, 해묵은 논쟁?
사실 과도한 비약이기는 하지만 ‘성장’의 개념을 주로 지향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분배’를 주요 가치로 삼는 사회가 ‘공산주의’에 가깝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사유재산제는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성장의 이면에는 ‘빈부의 격차’와 ‘자본의 비도덕성’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분배’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적 개념은 경제계층의 미분화로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닌다. 그로 인해 분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선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각각 따로 생각해보자. ‘성장’이란 ‘시장주의’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성장’은 이른 바 ‘파이’를 키우는 것을 모든 가치 위에 둔다. ‘시장(Market)의 원리’를 경전쯤으로 받아들이는 ‘성장’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 내는 효율성을 중시하기도 한다. ‘성장’은 시장에서의 보장된 자유 경쟁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효율과 성과를 냄으로써 ‘파이’를 늘려간다.
이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시장을 개방하며 경쟁을 부추긴다. 아울러 효율성을 위해 임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을 낮추려는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쟁의 공정성’이나 ‘효율의 적합성’ 등은 투명하게 담보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경쟁은 공정한 룰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효율 역시 본질적으로 누구를 위한 효율인지 애매모호하다는 것.
애초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이는 더 많이 벌 것이기에 공정 경쟁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자원은 한정돼 있는 것이기에 자원경쟁은 태생적으로 ‘제로섬게임’일 수밖에 없다. ‘분배’는 이렇듯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된 모든 ‘부’의 합을 적정한 기준에 의해 공평한 차원에서 나누자는 것이다.
사실 ‘성장’이라는 개념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볼 때는 인류문명의 진보 혹은 개발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차원에서의 ‘성장’은 결국 인간에게 나쁘지 않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발전과 그로 인한 생활의 윤택, 의학 발전을 기반으로 한 수명의 연장과 문명의 이기로 인한 삶의 질 향상 등 ‘성장’은 인류에게 달콤한 과실을 선사하기 때문.
하지만 일반적으로 경제 분야에서 회자되는 ‘성장’이란 국가 차원의 성장을 의미하는바 개별 국가의 ‘성장’의 개념을 엄밀히 따져 보면 ‘성장’의 의미가 달라진다. 결국 국가 차원의 성장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산되는 ‘부(Wealth)’가 어떻게 국가별로 재분배 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성장‘은 ’분배‘의 또 다른 양태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분배’의 차원은 어떤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이 하루 2달러, 우리 돈으로 2,2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극빈층의 상당수는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남반구에 집중돼 있다.

‘성장’과 ‘분배’는 상호보완적
반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같은 부호는 1초에 28만 원을 번다. 개인에게 있어 이렇듯 엄청난 차이가 노정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정한 ‘분배’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희박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산된 부가 개별국가에 대해 어떻게 분배되는가가 중요하듯 개별국가에 할당된 부 역시 그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분배되느냐의 문제도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국가에 있어서도 ‘분배에 있어 적정하게, 공정하게 분배되는가’의 여부다. 이 역시 ‘성장’, 즉 전 지구적 관점의 ‘분배’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다 봐야 하는 문제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별 국가 차원에서의 ‘분배’ 역시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현실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논리에 대해 ‘성장지상주의자’들은 ‘분배’를 강조하면 성장 동력이 낮아지고 그로 인해 ‘분배’의 질 역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기업들의 의욕이 떨어지고 국민들이 불안해 한다는 것. 이러한 논리로 이들은 성장잠재력의 확충을 정부에 떠넘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즉, 원론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기만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리들을 종합해보면 결과적으로 좋은 ‘성장’, 바람직한 ‘성장’을 이끌어내려면 좋은 ‘분배’, 바람직한 ‘분배’가 선결돼야 한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성장’과 ‘분배’는 길항(拮抗)을 이루는 개념이 아니다. 이 두 개념은 새가 한 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듯, 상호 보완작용을 통해 완결된다. 이는 쉽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일정한 ‘성장’이 없으면 ‘분배’도 없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제대로 된 분배를 가능케 하려면 분명 성장은 반드시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터널효과(Tunnel Effect)’가 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 한 터널이 있는데 그 터널에는 ‘성장’과 ‘분배’라는 두 개의 차선이 존재한다. 터널을 통과하는 초기에는 두 개의 차선 가운데 ‘성장의 차선’에 있는 차들이 움직이게 되면 다른 차선, 즉 ‘분배의 차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곧 자신의 차선의 차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감에 참고 기다리게 된다. ‘성장’의 혜택이 자신들에게도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 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장의 차선’만 움직이고 자기 차선의 정체가 너무 길어지면, 즉 장기간 분배가 이뤄지지 않으면 ‘분배의 차선’에 있는 이들에게 불만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국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고 다른 차선으로 차를 이동하면서 터널 속은 더 혼잡해지고 정체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터널효과’다. 
‘터널효과’는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는 논쟁에서 흔히 인용되는 이론으로 ‘분배 없이 성장만 추구되다 보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고 급기야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공정한 ‘분배’가 ‘성장’을 유도한다
이 같은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리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사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룬 바 있다. 동시에 남미나 아프리카들의 경우와 비교해 급속한 경제성장의 과실을 비교적 평등하게 분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 조류였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소득격차가 크게 확대되고 빈곤 문제도 심각해졌다. 따라서 한국 경제가 이제 더 이상은 ‘평등주의적 성장(egalitarian growth)’을 달성한 동아시아의 성공 모델이 아니라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분배론자’들은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양극화가 경제성장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해왔고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 확대 등 소득 재분배를 위한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경제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성장론자’들은 너무 평등한 소득분배는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으며, 경제성장 그 자체가 양극화와 빈곤의 해결책이라고 시종일관 주장해왔다.
이런 논쟁은 지난 제18대 대선과정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된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통해 다시 범사회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져 나왔다. 이 용어는 ‘성장론’보다는 ‘분배론’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인데 여야의 대선주자들은 앞 다퉈 ‘경제민주화’ 실현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성장제일주의’가 강했던 우리 사회에서 부의 재분배가 공정하지 않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오롯이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특히,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단계를 넘어서 ‘기업결합’을 의미하는 ‘콘체른(konzern)'이 발달한 독점기업 형태를 보여 온 우리나라 재벌에 대한 대폭적인 ’수술‘은 불가피하며 이는 ’경제민주화‘의 첫 단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만큼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재벌이 성장의 단계를 거치며 제대로 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현재의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와 ’부의 편중‘이라는 폐단이 생겨날 수 있었다.
‘레이거노믹스’ 이래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강타했고 이에 따라 이전보다 ‘분배’의 불공정성은 더욱 커졌다. ‘신자유주의’라는 기제가 세계화를 추진하며 지구촌 차원에서 생산되는 모든 부의 공정한 재분배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등 선진자본국들의 제3세계 등 후진국에 대한 자본착취가 극에 달하고 이는 곧 후진국들에 포함된 개별적 인간들에 대한 ‘비인간화’로 이어져 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였다. 이러한 굴레 속에 우리나라의 경제상황도 작든, 크든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도 ‘성장제일주의’로만 치달을 것이 아니라 적절하고 공정한 ‘분배’가 이뤄져야 할 시점이다. 공정한 ‘분배’가 없이는 사실상 ‘성장’도 그 동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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