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대의 전쟁,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 입력 2013.03.12 13:50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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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인류 최대의 전쟁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의 역사로 기록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시대의 참혹한 결과물이었다. 유럽의 각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며 제국주의화를 가속화하면서 각국의 이해가 상충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세계대전이었던 것.
특히 과학의 발달로 무기가 첨단화되면서 전쟁의 규모는 더욱 확대됐고 여러 국가들이 참전하면서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이후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면서 유럽대륙을 초토화시켰다.
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동안 이어졌고, 1000만여 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2차 세계대전은 더욱 참혹해 군인만 약 2,500만 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3,000만 명에 달했다.


인류 최초의 ‘세계전쟁’, 제1차 세계대전

1910년까지 유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3국동맹’과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3국협상’ 등 잠재적 적대관계에 있는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한다.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것.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 7월 25일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였지만, 두 가지만은 거부했다. 세르비아 관리 해임권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라는 요구와 세르비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反)오스트리아-헝가리 저항조직을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이 직접 고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그 것.
세르비아는 이 문제를 국제 중재에 맡기자고 제의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부분동원령을 내렸다. 실제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것은 7월 28일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은 이튿날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1914년 8월, 전쟁이 일어나자 애국심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또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은 유럽의 주요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14년 9월에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 진격을 중단시켰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부전선은 3년 반 돈안 거의 변동이 없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싸웠다. 러시아는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휴전을 요구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은 중립국이었으나 독일 잠수함이 미국의 비무장 선박을 침몰시키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미국은 1917년에 연합국에 가담,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제공했다. 결국 1918년 가을, 동맹국이 항복하며 전쟁은 마무리됐다.

연이은 비극,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들의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 세력은 방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이들 식민지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블럭화된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반면 오랫동안 분열돼 있다 새로이 통일된 근대 민족국가로 거듭난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19세기에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일본 등 자본주의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충분치 않아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과의 무역에 의존한 경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계경제대공황 이후 각국이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취함에 따라 이들 자본주의 후발 국가들은 큰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따라 히틀러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전쟁을 단행하게 되는데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약 6년간의 치열했던 전쟁은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 제국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의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38년부터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했으며,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했다.
독일은 더 나아가 유럽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소련까지도 쫓아냈으며 영국까지도 총공격을 개시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또한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해 약 34만 명을 살상했다. 영국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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