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대표의 무대

그의 정치 무대에선 '김무성 대표'를 줄여 무대라 부른다

  • 입력 2015.05.16 04:51
  • 수정 2016.02.23 13:29
  • 기자명 조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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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안을 두고 청와대와의 충돌 강도가 세지며 세간의 이목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집중되고 있다. 김 대표는 “연금개혁안의 내용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비판하라"며 청와대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며 또한, “당 협상에 재량권을 줘야한다”, “기가 막힌 심정”이라며 상당한 강도의 발언을 이어갔다. 이 수위에 그치지 않고 "맹탕 개혁, 졸속, 비열한 거래, 매도당한다,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지" 등의 최고조에 달한 발언을 이어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김무성 대표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1951년 부산 태생으로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5선 국회의원이다. 그는 흔하지 않은 로열패밀리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행운아였다. 김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는 전남방직주식회사의 창업주였다.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에 26세에 동해제강 회사 상무가 되었으며 32세에 삼동산업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는 기업 활동에 그치지 않고 전두환 정권 때 YS를 찾아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김 대표는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었음을 자랑한다.

김무성 대표는 1985년 민주화추친협의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래로 현재는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전경에게 폭행을 당해 허리에 10년간 복대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1980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민주화추진협의회 출신임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김무성은 당시 전국에 ‘민추협’이 주최하는 ‘대통령직선제 개헌’ 현판식을 하러 다녔다. 전두환 정권의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친위 쿠데타를 할 수도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기 때문에 분위기가 흉흉할 때였다. 경찰이 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대학 2학년 때 서울-부산 자전거 여행 당시 시골마을서 휴식하던 도중
대학 2학년 때 서울-부산 자전거 여행 당시 시골마을서 휴식하던 도중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등 당직자로 지내던 김무성은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 선대위 재정국장을 맡는다. 소위 '돈 만지는 일'은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에게 맡긴다. 그 뒤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자당을 창당한 후부터 정치적 탄탄대로에 올라섰다. 1993년 YS의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내무부차관 등을 지낸 뒤 1996년 제15대 총선부터 부산 남구에서 연달아 3선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해 ‘친박 무소속연대’를 내걸고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 불출마했지만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에 나가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 대표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사무총장, 최고위원, 원내대표를 두루 섭렵했으며 ‘친박 좌장’의 별명도 얻었다. 현 청와대와의 갈등이 무색하게 당시 박근혜 후보는 그를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기용함으로써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기도 하였다.

흔치 않은 로열패밀리

김무성 대표는 말 그대로 보기 드문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며 '로열패밀리'다. 그의 아버지 김용주는 일제강점기하 경북도회 의원,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였다. 전쟁에 나간 ‘황군’에게 위문편지 보내는 운동을 폈다고 알려져 있다. 김용주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전남방직을 불하(拂下) 받아 부자가 되었다. 그 회사를 물려받은 김 대표의 형 김창성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염창동 당사를 빌려주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도 참여했다.
 

로열패밀리로부터 나오는 명(明), 그리고 암(暗)

비교적 최근인 작년 말에는 현재 수원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인 김무성 대표의 딸 김현경 씨는 임용조건을 충족시키지 못 하고도 임용되었다는 의혹제기가 있었다. 모 종편의 취재 결과 김현경 씨가 학교에 낸 이력서에는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이 확인됐다. 또한 수원대학교 이인수 총장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교수협의회가 총장의 횡령·탈세 의혹 등을 폭로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 대표가 담당 상임위원회를 찾아가 수원대 총장을 증인채택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 김현경 씨는 수원대 교수로 채용되었다.

김 대표의 아버지인 김용주 씨가 친일 행적을 하였다는 의혹 제기 또한 존재한다. 김용주씨는 일제강점기하에서 경북도회의원을 지냈으며 조선임전보국단(일제 강점기 말기 1941년 9월에 태평양 전쟁 지원 연합 단체)하에서 간부를 지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하에서도 주요 요직에 종사한 것을 근거로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또한 전남방직을 불하 받은 것 역시 의혹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이다. 실제로 1941년도 매일신보에는 “금전용주金田龍周(김용주의 창씨개명)씨로부터 황군 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할 것을 긴급동의하야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조선 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한 것이 된다.

반대로 김무성 대표 부친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의혹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웃지 못 할 해프닝으로 끝난 바도 있다. 2013년경 당시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이 현안 브리핑에서 김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 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고 논평한 것이다. 배 대변인은 사실관계 확인 뒤 김 대표에게 공개 사과했다. 또한 <한겨레> 신문도 김 대표에 대해 틀린 부분을 적시하였다며 사과하였다.

불패의 기록을 가진 ‘선거의 왕’

얼마 전 치른 4.29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일궈낸 김 대표에겐 '선거의 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지난 몇 번의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불패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7.30 재보궐선거 당시에는 세월호 참사라는 악재 속에서 11:4라는 상당한 결과를 일궈냈고, 4.29 재보궐선거에서는 3개의 의석을 가져오며 불패 신화를 이어나갔다. 그로 인해 후보를 선택하는 그의 탁월한 안목에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은 재보궐선거 승리 뒤, "'선거의 여왕'이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 이름을 하나 붙여 드리겠습니다. '선거의 남왕'도 있다, 앞으로 그렇게 존칭하겠습니다."라고 발언하며 그의 입지가 확고함을 여실히 나타내었다.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으로 보인다. 지난 2월 김 대표는 모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현재로서는 대권 생각이 없다"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최근 여론조사 추세를 살펴봤을 때 그가 언제든지 대권 후보로 나설 가능성은 여지가 충분하다. 대선에서까지 불패신화가 계속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대화록 공개에 따른 극단의 평가

2012년 12월 14일, 대통령 선거를 닷새 앞둔 날, 당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부산 서면 금강제화 앞에서 비를 맞아가면서 울분에 찬 열변을 토해냈다. 노무현 김정일 간 대화록을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후에 국정원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한 덕에 그가 낭독한 것이 발췌본이 아니라 대화록 전문에서 뽑아낸 것임이 확인됐다. 당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읽은 문장은 국정원 발췌본에 없고 전문에만 있는 문장이다. 그는 당시 의원 신분이 아니었다. 의원이 아님에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입수 열람한 것이다. 그 덕택에 국가기밀을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이념 비방으로 선거전에 활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역으로 이 사건이 김 대표의 용기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감옥에 갈 각오까지 하고 대화록을 공개했다는 평가이다. 소위 ‘희생타’를 날렸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로열패밀리’ 출신들의 행동 패턴과는 크게 다르다. 흔히 ‘금수저’ 출신들이 몸을 사리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과 달리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한다는 평을 얻은 것이다. 젊어서는 박해받던 야당 지도자 김영삼을 도우면서 정치를 시작한 일화 또한 그가 용기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에 힘을 싣는다.

김무성 정치의 미래 무대

그는 정치의 핵심을 유연성으로 정의한다. 만난(萬難)을 무릅쓸 각오가 있어야 정치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보통사람은 그걸 견디기 어렵지만 정치인이 되려면 그걸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지간한 건 웃고 넘겨야 하며, 정치인은 먼저 화내면 지는 것이란다. 정치 철학을 들여다봤을 때, 청와대를 향한 강도 높은 발언이 그의 정치철학 변화의 입증이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선거의 왕’에서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의 변환을 위한 정략적 변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금수저는 녹슬지 않는 것처럼 그의 불패신화가 계속될지, 혹은 색이 바래 대선 뒤에는 최초의 추락이 일어날지 김 대표를 향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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