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아시아의 재패를 노리다

  • 입력 2013.01.28 14:57
  • 기자명 조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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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를 바꾼 20대 전쟁

지난 수천 년 간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에 대해 “도전과 응전”이라고 설명했듯 인류역사를 전쟁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더불어 그는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요인”이라고 역설하기도 해 전쟁의 해악성에 대해서도 꼬집은 바 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 수많은 전쟁들이 있어왔고 그 전쟁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왔다. 본 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역사의 물길을 뒤바꾼 스무 차례의 큰 전쟁을 돌아보고 그 전쟁이 세계사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를 20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註)

‘일제’, 아시아의 재패를 노리다
제국주의 ‘일본’을 탄생시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했다. 메이지 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해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라고 정했다. 곧 메이지 정부 주도하에 두 차례의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의 근대화를 이뤘다.
이어 봉건적인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했는데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의 기술과 제도의 직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왕을 신격화하고 ‘신토’에 국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곧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킴으로서 제국주의로의 변모를 보여주는데 한국과 타이완, 사할린 등을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벌여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하기도 했다.

‘청’의 몰락을 가져온 ‘청·일전쟁’
1854년 미국의 간섭으로 200년간 계속된 쇼군 통치하의 에도시대를 마감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거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과 막부시대의 몰락에 이은 일련의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일본이 봉건후진사회에서 근대산업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은 각국에 대표단과 학생들을 파견해 서양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모방했다.
동시에 일본은 사할린, 쿠릴 열도, 둥베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온 러시아를 경계,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안으로는 힘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를 위한 체계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전통적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 왔으며, 보수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개화당들은 일본과 서방 국가들과의 연대를 확립하기를 원했다. 아편 전쟁과 청불전쟁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청나라는 약해졌고 서양 열국의 간섭과 잠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를 조선에서 청나라 대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조선 내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혼란을 보이자 1894년 7월 25일, 일본 연합함대가 항해중인 청국 순양함 ‘제원’과 ‘광을’을 향해 포탄을 발사한다. 이로써 동아시아 패권을 노린 일본에 의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서구 문물의 혜택을 입은 일본군이 점차 승리가 굳어져 갔고 청나라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수세에 몰리던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면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조선에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한국 식민지화’로 이어져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나, 반일 의병투쟁을 야기함으로써 더욱 수세에 몰렸다. 또한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조선에 친러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사실상 조선의 경제권은 일본의 수중에 있는 등 일본과 러시아 간 조선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해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더불어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해 기어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뤼순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두 차례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 각축의 결과였으며, 이는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양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 영국과 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들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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