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끊임없이 물어지는 질문이 있다. 나 자신, 바로 ‘존재(Being)’에 대한 질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존재방식으로 쉼 없이 고민하게 되고,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 타인 앞에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얼굴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심리적 곤란함 앞에 놓일 때마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존전략을 세워왔고, 그렇게 형성된 것은 반복되고 굳어져 우리를 대표하는 성격이 되었다. 성
보통 자녀들은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한다. 힘 있는 아빠보다 연약한 엄마에게 더 안기기를 원하고, 놀아달라고 요구한다. 어쩌면 아빠도 자녀들이 엄마와 지내기를 바라고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에게는 아빠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아빠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가정에서 아빠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우선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한다. 경제적인 공급도 필요하지만, 안전과 보호도 아빠의 중요한 역할이다. 심리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아빠의 역할은 중요하다. 엄마와의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1869-1943, Gustav Vigeland)의 조각공원으로 들어서는 좁은 문이 성경 구절을 기억나게 한다. 다섯 개의 큰 문 끝에 열려있는 좁은 문을 통해 비겔란 조각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푸른 잔디와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꾸며진 정원 위에 비겔란의 초상 조각이 채 끝내지 못한 작품의 마지막 손질이라도 하려는 듯 오른손에 망치를 든 채 서있다. 비겔란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미술에 재능은 있었으나 미술 공부를 전문적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가 필수적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자율은 도리어 창의성에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자율을 통하여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지만 무조건적인 자율이나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율은 방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서 자녀의 창의성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학생들은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성장 과정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자율을 주는 것이 그들의 성장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없다. 계획적, 의도적, 가치 지향적인 의미를 갖는 자율만이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의 밑
지난해 말로 퇴사하고 연 초에 실업급여 수급자가 되었다. 경험자라면 느꼈겠지만 첫 교육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역전의 예비군 같은 너스레하고 홀가분한 심정보다는 까닭 모를 감정으로 섧고 추리하다. 맞다. 비틀즈(The Beatles) 'Yesterday' 가사처럼 “갑자기, 예전의 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심정 말이다. 그땐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취업희망카드'를 쥔 순간 설마 끝까지 수급자
한 법무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건으로 우리 사회는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법무장관후보자가 하고자 하는 개혁의 내용보다는 자녀의 교육 관련 내용이 주 내용이었다. 서울대학교 법대 인턴,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장학금, 의학전문학술지, 총장상, 의학전문대학원, 그리고 외국어고등학교, AP(advanced placement), 논문 제1 저자, 입학 사정관, 수시 전형, 예일대, 과학경시대회, 포스터 작성 등 교육 관련 수많은 단어가 난무했고 대학입시 제도 개편도 논의가 시작되었다.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이념과 사상을 넘어 자녀 교육
어느 부모나 자녀들과 친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가족이라도 친해지고 싶지 않은 구성원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적잖은 사람들이 부모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부모가 주는 상처가 다른 어떤 사람들이 주는 상처보다 훨씬 깊다고 말한다. 분명히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 사랑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친
아시아로 가는 북동항로를 개척한 16세기 네덜란드의 탐험가 빌렘 바렌츠의 이름에서 비롯된 ‘바렌츠 해’로부터 동쪽으로 ‘보트니아 만’과 ‘발트 해’,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와 ‘북해’를 끼고 남쪽으로 뻗어 내린 ‘스칸디나비아반도’가 있다. 그 곳에 있는 노르웨이를 찾아가기 위해 비행기 속에서 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이 계속되지만 북유럽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감출 수가 없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도착하는 순간 온통 나무와 호수로 뒤덮인 넉넉한 전원 위에 아름다운 집들이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노르웨이는 인구가 4
자왈子曰 우이호자용愚而好自用 천이호자전賤而好自專 생호금지세生乎今之世 반고지도反古之道 여차자如此者 재급기신자야災及其身者也 비천자非天子 불의례不議禮 불제도不制度 불고문不考文 금천하거동궤今天下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 수유기위雖有其位 구무기덕苟無其德 불감작예악언不敢作禮樂焉 수유기덕雖有其德 구무기위苟無其位 역불감작예악언亦不敢作禮樂焉 자왈子曰 오설하례吾說夏禮 기부족징야杞不足徵也 오학은례吾學殷禮 유송존언有宋存焉 오학주례吾學周禮 금용지今用之 오종주吾從周 공자는 병법을 공부하며 생존을 연구했던 사람이다. 중용 28장에서는 문화의 생로병사를
조선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학문적 대업적과는 달리 가족사적으로는 아픔이 컸다. 강진 땅에 머물면서도 멀리 떨어진 두 아들에게 ‘폐족(廢族)’임을 잊지 말고 독서와 행실에 각별히 주의를 주곤 했으며 따로 똑같이 유배를 당해 흑산도에 머문 둘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초당의 동쪽 언덕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곤 했었다. 참척(慘慽)! 참혹할 참(慘)에 슬퍼할 척(慽)이 연이은 이 단어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가리키는 말로 어떤 상실보다 큰 아픔이기에 오히려 불효로 친다. 이는
한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를 통찰과 직관적 사고를 통하여 해결했을 때, 누구나 아하(Aha)를 외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는 금관의 순도를 알기 위해 애를 쓰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목욕통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Eureka, 알았다)를 외쳤고, 천재 수학자 가우스는 1+2+……+100을 계산할 때 1+100, 2+99, ……로 생각하여 101×50=5050의 답을 생각해 내며 아하(Aha)를 외쳤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아인슈타
자녀와의 관계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데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부모는 자녀와 깊은 공감을 나누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어떤 부모는 대화할 때마다 서로 상처를 남기며 관계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우선 부모-자녀 간의 대화 패턴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녀가 말을 배우기 전, 옹알이를 할 때부터 시작된 상호 관계의 축적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아무리 아기가 옹알이로 뭔가를 표현해도 관심이 없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알아듣지는 못해도 끊임없이 그 옹알이에 반응해 주는
자살을 결심했던 톨스토이가 신앙 앞에 그의 인생을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기도를 한다. 슬픔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잠을 깬다.나는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어 비를 맞으며 헤맨다.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시여, 날 도와 주소서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 주소서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떠올리면 중학교 다니던 때 형님의 책꽂이에서 몰래 꺼내어 조금씩 읽던 일이 생각난다. 그 때마다 어린 것이 어려운 책을 허락없이 꺼내어 읽는다고 혼내던 형님
미국 최초의 흑인퍼스트레이디 미셀 오바마는 그녀의 자서전 「비커밍 (BECOMING)」에서 변호사와 저자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 오바마의 기괴한 습성을 소개한다. 그는 가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방에 책이 널린 공간을 필요로 했는데 미셀은 그곳을 ‘굴’이라고 표현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을 말한다. 굴은 오바마에게 통찰이 태어나고 명료함이 찾아드는 일종의 성소다.계몽주의 지성 몽테뉴도 38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포도주로 유명한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 위치한 곳에 자신의 성채를 마련, 칩거를
필자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체벌이 일상이었다. 숭일중학교 미술부였던 필자는 특히나 국사나 세계사에서 년도 외우기를 게을리 했는데, 갑자기 한문 선생님이 만세운동이 일어난 년도를 물었고 나는 대답을 못했다. 앞에 나가 교탁에 손을 얹고 대나무 뿌리로 손등 20대 맞고 외웠던 1919년. 한국에서 3.1~6.10 만세운동이 일본군의 잔혹한 폭압 속에서 일어나던 때, 1919년 5월 29일 지구의 남쪽에서는 개기일식이 있었다. 아프리카 근처의 프린시페 섬에서 ‘에딩턴’은 10여명 팀원들과 함께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것을
필자는 두 번에 걸쳐 자사고 논란에 대해서 칼럼을 기고했다. 그런데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자사고 폐지를 반대 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하기의 표를 보자. 현재 대한민국의 중학생 100명이 진로에 따라 노동시장을 진입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연구다. 현재 대한민국 젊은 학생 100명 중 50명이 제때 취업을 못하고 있다. 이는 일반고에서 바로 무직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특성화고보다 크다. 즉, 일반고에 대학 진학에 대한 목표나 의지도 없고, 그렇다고 취업에 대한 교육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몰려있다는 이야기다. 한마
입추도, 말복도 지났는데도 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과거에는 8월 15일이 지나면 바닷물 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요 근래에는 8월이 다 가도 더위가 가실 줄을 모르니 하루하루가 힘들다.각종 매스컴에서는 금년보다 더 더운 해가 있었고 금년 최고기온보다 더 더운 곳도 있었다는 보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더위는 생각나지 않고 금년 여름이 제일 더운 것으로만 생각나는 지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한다. 그중 에어컨이 제일이다. 서민들은 전기료가 아까워 에어컨이 있어도 한두 번 사
“선배님, 넥타이부터 푸세요.”퇴직 후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한마디라며 내게 소개해준 멋진 말이다. 다 내려놓고 편하게 살라는 거다.요새 아내한테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어금니 풀어!”다.휴대폰 사진에 찍힌 내 모습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아하 아직도 더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한다.그렇다. 사람이 뭔가 결심을 하거나 작심을 할 때 세 가지가 달라진다.첫째는 살아있는 눈빛, 둘째는 주먹 쥔 손, 셋째는 꾹 다문 입이다.40대 초반의 여성이 거의 죽을 뻔한 교통사고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난 이야기
‘동기’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불가능한 언덕을 오르게 한다. 인생의 한 고비 한 고비 앞에서 그것은 삶을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때로 그 에너지는 특별한 형태로 삶을 지각하도록 조종하고 판단을 흐리게도 하는데, 강박관념처럼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지배한다. 어쩌면 우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는 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주 좌지우지되는 중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것은 마치 중독과도 같다. 중세 시대엔 이러한 특별한 강박들을 ’열정‘이라 불렀다(리차드로어, 1993). 우리는 이 특별한 열정으로 인해
과거에 너무 안주하게 되면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세상은 무섭게 변화되고 있는데 자신만은 아직도 과거 속의 사람이길 바라는가? 코칭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 있다. 대기업 임원으로 지내다 은퇴 이후 대학원에 입학했다. 새롭게 국가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기업 임원들에게 비즈니스 코칭을 하고 있다. 매년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며,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젊은 친구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