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종착역이다. 이르쿠츠크 역이었다. 이르쿠츠크는 현대 러시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르쿠츠크는 19세기 초부터 일기 시작한 러시아의 젊은 장교와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일군 신세계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신세계란, 나폴레옹전쟁에 참전하여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을 말한다. 그들은 새로운 체재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전제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헌신한 데카브리스트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르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유배 와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르쿠츠크, 시베리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던 크리스마스트리가 몇 년 전 갑자기 미국에서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등극했다. CNN까지도 특별보도한 이 트리는 역삼각형으로 뒤집혀 있었다.역발상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실행한 예가 있을까. ‘로꾸거’ 하라. 물구나무서기 하듯, 거꾸로 세상을 보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정반대로 해보라. 좌우상하 다 바꿔보라. 이런 연습이 자극이 되어 좋은 아이디어가 마구 솟아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동물원에 손님이 없자 담당 직원의 제안으로 사람을 가둬보았다. 그러자 손님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는 넵스끼 대로는 폭 25m, 길이 4.5km의 직선 도로이다. 이 도로에는 도시를 흐르는 강과 운하들을 교차하면서 그 위에 만들어진 다리들이 아름답게 놓여있고, 요소요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는 다리들은 도시가 형성되던 초기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는데 아직도 그 아름다운 예술성은 변함이 없다. 넵스끼대로 마이까 강변에 알렉산드르 푸슈킨 박물관이 있다. 푸슈킨이 네덜란드 공사의 양아들이었던 조르쥐 단테스와의 운명적 대결로 총상을 입고
심리학에 자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용어가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머튼(R. Merton)이 사용한 용어로, 어떤 일이 실제 발생할 것이라는 증거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반복적 믿음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내용의 논리적 체계를 말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처럼 다짐이나 소망을 적어 자신의 생활방식이나 환경 조성에 영향을 주면 그러한 모습으로 변한다는 의미이다."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난다."고 수십 번을 다짐하면 알람신호가 없이도 일어나는 것처럼
친구들 중에서도 결혼을 일찍 한 친구들을 보면 혼자 사는 친구들이 결혼을 빨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학교 때문에 서울에 와서 혼자 오랫동안 살다가 부쩍 외로움을 느껴서 그때 만나고 있었던 남자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경우다. 따로 살다 보니 부모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또 늦은 시간까지 놀다가는 남자친구에게 차라리 이럴 바에 결혼해서 빨리 돈을 모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결국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런데 참 웃긴 것이 결핍이 있어서 그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경우는 그 결핍 때문에 또 힘들어진다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후 누이, 아버지 등 가족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뭉크는 평범한 산책길에서도 공포와 우울을 느낄 정도로, 한평 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공황발작이라는 정신병의 강박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불안은 그의 영혼을 마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잠들어 있던 내면의 예술성을 더
우리는 살아가면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참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화를 참고 견디도록 훈련받는다. 하지만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참기만 한 감정은 꼭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서 어떻게든 다시 그 존재를 드러내고야 만다. 인간의 무의식 영역을 중요시했던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살아서 묻히면 더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짐짓 참을만했다고 장담했던 감정들은 사실 나중에 더 괴팍한 모습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억눌렀던 것
"내가 낳은 아이지만 정말 힘들어요. 어떻게 이런 애가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딸에 대해 엄마가 말하는 첫 마디였다. 자녀를 양육하느라 참으로 많이 힘들고 고단한 모습이 읽혔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다는 건 딸도 힘들다는 뜻이다. 모든 관계는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녀 문제로 힘들어서 찾아오는 대다수의 경우 자녀에게 일차적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춘기의 경우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 기복이 심하여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어떻게 부모가 반응하는가에 따라 달라진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고 양파도 잘 자라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칭찬을 듣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다음 행동에 강화를 가져온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를 질책보다는 칭찬으로 길러야 한다며 칭찬을 최선의 자녀교육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칭찬만이 자녀의 성장과정에 필요한 교육적 방법인지, 칭찬이 자녀의 행동을 교정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가는 따져볼 일이다. 첫째, 발달 과정에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때의 칭찬에 관해 생각해 보자. 자녀가 발달 과정상에 필수적으로 실천해야 할 과업을 행동으로 옮겼을
목련이 곱게 피던 어느 이른 봄날, 사랑하는 후배들의 초청으로 군사교육의 요람인 자운대(紫雲臺)에 특강하러 갔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 꽃들의 잔치였다. 신작로 양쪽을 흐트러지게 장식하고 서 있는 연꽃의 물결, 갈잎 큰 키 나무의 꽃은 글자대로 꽃 모양이 연을 닮았다 해서 불리는‘나무의 연(蓮)’목련(木蓮)이다.그래서 목련의 꽃말은 자비, 은혜, 고귀함을 담았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 '연모'라는 애틋한 꽃말을 갖고 있어 아름다움으로 시선은 끌지만 뜻깊은 날 연인에게 선물하기에는 너무
주변에 결혼 안 한 친구들을 보면 하나같이 "결혼할 사람이 없다"라고 말한다. 나 또한 늦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 다 안다. 그때 친구들은 나에게 "너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가 나중에 휴지통 뒤지게 된다!"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제 이만큼 나이도 들다 보니 만나본 경험은 많아지는데 어떤 사람이 진짜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판단력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20대 때는 얼굴을 위주로 사람을 보았다면, 30대 때는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얼마나 잘해나가는지, 그의 능력은 어떻게 되
본연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며, 비는 내리며 강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별은 빛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꽃은 피고 진다.그러기 위해 새에게는 날수 있는 날개가 있고, 물고기에게는 헤엄치는 지느러미가 있으며, 꽃은 아름다운 향기를 품는다. 그런데 점점 새는 날지 않고, 물고기는 헤엄치지 않고, 꽃은 굳이 향기를 내지 않는다.몸무게 250그램의 큰되부리도요새는 알래스카와 뉴질랜드 사이를 한 번도 쉬지 않고 11,500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정말로 공감한다. 육아는 아이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육아를 하면서 나 자신을 키우는 것이다. 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육아라는 것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참을성을 요구하는지...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인격적으로 성장을 요구하는 것인지 해 본 사람만 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육아의 경력은 이력서 한 줄도 되지 않는다. 어느 CF 광고의 카피처럼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것일까?
시공간적으로 우리 앞에는 농업과 수렵시대를 연상하기에 딱 좋은 풍광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엘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1의 물결시대처럼 문명의 상징인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흔히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소개할 때는 "끝없이 펼쳐지는 야생화 단지와 자작나무 숲을 감상해보라"라고 안내를 한다. 그러한 권고의 기준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느 만큼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안내하는 사람도 여행을 결정한 사람도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서로 '묻지 마' 동조를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열차 안에 들어앉
얼마 전, 미국 타임지에 미국을 대상 쓴 기고문(기고자: MATTHIAS DOEPKE AND FABRIZIO ZILIBOTTI, 제목: Americans Are Often Told to Parent Like Scandinavians. Here’s Why That's Impossible)이 미국보다는 오히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미국보다 더 심각한 불평등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각종 국내외 통계지표가 보여주고 있듯
엄마들을 대하다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한 부류는 자녀 양육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는 엄마들이다. 그래서 해 준 것보다는 못 해 준 것이 생각나고 항상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고 심할 경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한 부류는 자녀의 문제와 나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엄마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 주었기 때문에 나에겐 잘못이 없으며 잘못되거나 못 따라오는 것은 모두 아이 탓이라고 돌린다. 하지만 엄마가 희생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자녀가 완벽하게 성
지난 칼럼에서 '시작, 그 어설픔 채로 초라함을 버티는 것'으로 첫 글을 열었다. 그럴듯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우리 자신에게 나답게 살기를 도전했고, 그 길이 '바보의 여행인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험하라 요청했다. 칼럼에 남겨진 피드백 중에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못 하고 그냥 힘들다 하고만 있었는데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다."라는 댓글이 왠지 짠하게 와닿았다. 사실 세상은 요란스럽고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은 내가 나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나는 냉장고를 좋아한다.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까.나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나와 놀아주니까.나는 로봇을 좋아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그러나 나는 엄마는 싫다. 잔소리만 하니까."어느 초등학생의 글이다.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무엇일까?첫째는 “공부해라, 열심히 공부해라”이고,둘째는 자녀나 친구 간에 비교하는 말이라 한다. 이 말은 현재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모들도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말이고 그때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기도 하다. 이같이 부모로부터 자주 들으면서 싫어했던 말을, 부모가 되어서 자
가는 봄날이라서 그런가, 올해 신록은 유독 눈이 부신다.아기 속살처럼 보드라운 나뭇잎은 간지러운 바람에 햇볕을 듬뿍 담았다. 카메라로는 담을 수 없는 색깔과 자태와 파란을 두 눈과 가슴에 가득 안고 동네를 찬찬히 걷는다. 공원에 모여 있는 행복한 일상은 참 보기 좋다.어린이날에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로 이어지는 가정의 달인지라 딱히 그날이 언제인지 꼭 집지 않으련다. 색다른 부자의 모습이었다. 휠체어에 의지해 불안하게 걷는 아버지와 그 곁에서 어쩔 줄 모르는 아들. 아버지가 휠체어에 앉고 아들이 미는 각본 같은데 아버지
내가 육아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럽게 외벌이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다 해결했다. 내가 돈을 벌어서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면서, 나에 대한 투자도 했다. 그런데 육아를 하면서 처음에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 돈이 만족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세 식구가 그냥저냥 살아갈 정도는 되기 때문에 목숨 걸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걸로 인해서 더 큰 문제들도 많지만...) 그런데 남편 돈 받